History & Human Geography

“간통 들키자 남편 음낭을…” 한 여자만 50년 쓴 실록 속내

Jimie 2024. 5. 14. 21:20

“간통 들키자 남편 음낭을…” 한 여자만 50년 쓴 실록 속내

 

 

⑨ ‘500년 실록’ 현대어로 옮기는 고전번역가들㊦

 

사람들끼리 역사적 사실을 두고 “그럼, 실록에서 찾아보자”고 내기하는 경우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웹서비스에서 검색해 안 나오면 “거봐, 사실이 아니잖아” 이런다. 실록에 기록이 없다고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조선시대 역사 기록물이 실록만 있는 것도 아니다.

 

『승정원일기』가 대표적이다. 조선 초부터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아쉽게도 임진왜란(조선 전·후기를 가르는 기점) 등으로 전기 기록은 불타 없어졌다. 정조(재위 1776~1800)가 세손 시절부터 쓴 일기에서 출발해 공식 기록물이 된 『일성록』도 있다. 임금의 동정과 국정 제반 운영 사항 등을 매일매일 담았다. 실록과 달리 필요 시 왕이 그때그때 참고할 수 있었다는 게 특징이다. 역시 조선 후기 기록만 남아 있다.

 

조선 500년사가 포괄적으로 담긴 기록물은 실록이 유일하다. 무엇보다 실록은 왕의 사후에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압축해 편찬했다는 점에서 당대의 역사 인식을 반영한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 현대화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번역자들은 “일성록의 보름치가 실록의 두 달치와 맞먹고, 승정원일기 사나흘치가 실록 두 달치 분량”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실록에 기록할 정도면 그 시대의 중요한 사안이나 관심사였다고 볼 수 있죠.”

오대산사고본 중종실록 권41-42. 임진왜란 후 가까스로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추가 제작할 때 성종실록과 중종실록은 최종 교정쇄본을 오대산사고에 보관했다. 당시 사관들이 손수 빨간 글씨로 교정한 흔적이 남아 있는 귀한 자료다. 사진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그런 점에서 조선 전기에 ‘졸기’를 빌려 여성의 음행(淫行)을 마치 눈으로 본 듯이 서술한 경우는 이채롭다. 앞서 예시한 단양군사 남의(南儀)의 아내 이야기(☞음탕한 관료 부인도 기록됐다, 조선왕조실록 ‘집요한 번역’) 외에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지(李枝)의 후처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최소영 연구원에 따르면 이 여인은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실록에 조화(趙禾)의 아내 김씨라며 첫 등장해 제7대 세조실록까지 약 50년간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조화가 숨진 뒤 이지와 재혼하는데 태종실록엔 다음과 같은 기사(기록)가 전한다.

 

“사헌부에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지(李枝)를 탄핵하였으니, 고(故)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화(趙禾)의 아내 김씨(金氏)에게 장가든 때문이었다. 김씨는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김주(金湊)의 딸로, 아름답고 음란하였는데 나이들수록 더욱 심해졌다. 형제와 어미가 모두 추한 소문이 있었다.…”(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1월 1일 갑오 두 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번역 현대화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김옥경(61) 고전번역실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책임연구원, 김현재(41) 조선왕조실록번역팀장, 최소영(35)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연구원(왼쪽부터). 김종호 기자

“간통한 처가 들키자 남편의 음낭을…” 세세히 기록

그러다가 세종실록(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3일 임진 두 번째 기사)에 ‘영돈녕부사로 치사한 이지의 졸기’ 중에 김씨가 등장하는데, 이지가 사망에 이른 원인이 몹시 구체적이다.

 

“영돈녕부사이자 태조의 사촌동생이었던 이지의 졸기인데, 그가 어떤 인물인지 생전 일화를 통해 설명한 뒤에 79세에 갑자기 죽은 사연을 전하거든요. 내용인즉 함께 재를 지내러 절에 간 부인 김씨가 중과 간통해서 남편이 욕하고 때렸는데, 김씨가 되레 남편의 음낭(원문에는 腎囊[신낭])을 잡아 뜯는 통에 숨졌다고 해요. 절에 따라간 사람이 모두 김씨의 노비여서 이를 숨기는 통에 외인(外人)들은 알 수 없었다고 해놓고 사관은 이렇듯 자세히 썼죠. 중앙 조정 신료들이 직접 보았을 리 없는 사람의 말과 행동, 심지어는 속내까지 마치 실제로 보고 들은 양 낱낱이 기록해 놓은 대목들이 눈에 띄어요.”

 

꼼꼼한 기록은 당대 사회 풍속을 전해 주는 한편 이런 사회에 대해 우려하는 사관(史官)의 시선도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는 고려 풍습이 그대로 남아 여자도 여러 번 결혼하곤 했지만, 이후 성리학이라는 지배이념 정착을 위해 자녀안(姿女案)을 시행하면서 여성의 재가·삼가를 막았다. 자녀안은 양반집 여자로서 음행을 저질렀거나 세 번 이상 개가한 여자의 소행을 적는 대장으로 여기에 오르면 집안의 불명예가 됨은 물론 자손의 과거나 승진에 큰 불이익을 초래했다. 김씨 역시 자녀안에 올랐고, 이 때문에 그의 후손 벼슬길에 논란이 있었다. 여성의 재가 규제는 성종 때인 1477년 경국대전을 통해 법제화됐다.

조선시대 왕이 승하하면 새 왕이 명령해 실록청을 차리고 전대 왕의 실록을 수년에 걸쳐 편찬했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영상을 캡처한 것으로 기사 하단에 영상이 첨부돼 있다.

 

반면에 꼼꼼히 썼지만 ‘팩트’가 아닌 기록도 눈여겨볼 만하다. 세조실록에 종종 등장하는 신비로운 자연현상이 대표적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 국가에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끝내 죽이기까지 한 인물을 두고, 그의 사후에 실록을 편찬하면서 ‘불교적 신비’를 마치 사실인 듯 담아냈다.

 

“세조가 어디를 갔는데 부처님이 나타났다, 꽃비가 내렸다, 이런 식인데 마치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썼어요. 세조는 자신의 윤리적인 결함을 회복하려고 불교를 적극 이용했는데 실록 편찬관 다수도 결국은 세조의 공신이었기 때문에 세조실록에 이런 기록이 남은 것 같아요. 이렇듯 조선왕조실록을 하나의 일관된 역사기술로 보기보다 각 왕대의 특성에 따라 개별적인 실록의 특징을 보려는 연구도 시도되고 있답니다.”(최소영)

당대 엘리트가 ‘속기사’처럼 기록…편찬 뒤 봉인

사초(史草)와 이를 토대로 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한 한림, 곧 사관은 당대 최고 엘리트였다. 글과 학문이 뛰어난 건 물론, 집안도 가려가며 뽑았다. 출세가 보장된 이들인데 정작 입궐해선 밤낮으로 일종의 ‘속기사’처럼 일했다. 왕의 동정은 물론 경연의 시행 여부, 중요한 상소, 주요 인사 행정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게 그들의 책무였다.

 얼마나 고되었는지 ‘매일 적어 내는 일이 고역이라 집에도 못 간다’ 이런 푸념도 전해집니다. 그날 그날 혹시 빼먹은 게 있나 서로 비교하고 보충했고, 한 달에 한 번씩 이를 시정기로 묶었지요. 이걸 춘추관에 보관했다가 왕이 승하하면 실록청을 차리고 2~3년에 걸쳐 실록을 편찬했죠. 사고(史庫)에 봉인해 보관할 뿐, 왕도 볼 수 없었어요. 

조선조 500년 동안 실록 편찬은 왕권도 미치지 못하는 사관들만의 고유 영역이었다. 심지어 실록 편찬자들도 그 전대 실록을 보지 못했다. 왕이 국정에 꼭 필요한 경우, 예를 들어 세자의 대리청정과 같이 전례를 알아야 할 경우엔 한림을 사고에 보내 실록을 열람하고 적어오게 했다. 이를 고출(考出)이라 했는데 이 외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다만, 한 사람이 여러 왕의 실록을 잇따라 편찬하는 경우도 있고 의궤에 정해진 틀이 있어 체계와 형식은 일정하게 유지됐다.

조선 왕실은 각종 변란을 겪고 난 뒤 만약에 대비해 실록을 총 5부 찍어 춘추관과 4대 외사고에 보관했다. 조선 후기 이후 4대 외사고는 태백산(경북 봉화), 정족산(인천 강화), 적상산(전북 무주), 오대산(강원 평창) 사고다. 사진은 한일강제병합 직후까지 운영됐던 태백산사고의 전경.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유리건판 사진)

조선시대 사고(史庫)에서 실록을 보관한 궤(보관함). 사진은 성종실록 궤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독립성과 객관성은 정사(正史)로서 실록의 핵심 기둥이다. 종종 왕과 관료들이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랬다는 것까지 기록했다. 이 봉인이 풀리는 게 몇백 년, 몇천 년 후일지 모르면서 말이다. 나아가 성종실록부터는 사론(史論), 즉 ‘사신은 말한다(史臣曰)’로 시작되는 항목이 급격히 늘었다. 사건의 전후 관계나 사안의 옳고 그름, 관직 임명에 대한 의견, 생전 또는 사후의 인물에 대한 평가 등을 주관적으로 직필했다. 왕이 이를 볼 수도, 알 수도 없기에 가능했다.

 

 통치의 기본 이념이 유교적 문치주의(文治主義)라 ‘지금의 정치가 후대에 어떤 식으로 평가될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둔 결과죠. 실질적인 효과도 있어요. 예컨대 임금이 뭔가 하려는 게 전례에 없고 무리한 일이면, 신료들이 압박하거든요. 이걸로 역사의 첫 기록이 될 거다, 후대 사람들이 볼 텐데 정말 하시겠느냐 이런 식이죠. 양날의 검이죠. 전제군주인 왕이라도 아무렇게나 할 수 없고 신하 입장에선 견제하되 유교적인 명분을 가져야 했죠. 실제로 실록에는 왕과 신하의 경연, 토론, 옛 고전 인용 등이 치열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번역하는 게 굉장히 까다로운 이유죠.(김옥경) 

역대 왕도 못 본 실록, ‘번역’ 통해 모두에게 열려

실록은 애초에 일반 민중에게 지식 함양이나 정보 전달을 위해 만든 기록물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 이걸 ‘번역’하고 웹상에 공개한다는 것은 그 시대에 특정한 정치권력만 접했던 정보를 이제 누구나 읽고 접할 수 있게 됐단 의미이기도 하다.

“그 시대엔 읽거나 접할 수조차 없던 공공기록이, 시대가 바뀌면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지식콘텐트가 됐죠. 번역 행위는 이런 역사적인 체험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더 늘려가는 작업이고요. 우리가 번역을 좀 더 정확히 해놓으면, 대중에게 역사가 더 친숙해질 것이고, 창작자들도 대중에게 더 다채로운 포인트를 잡아서 창작물을 낼 것 같아요.”

조선시대에 실록을 편찬해 완성하면 사료로서 쓴 사초는 물에 씻어(세초) 실록 내용이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영상 캡처.

 

그렇다면 번역자들은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었을까.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번역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면서다. 그러면서 조선왕조실록 드라마를 쓰기 위해 (비록 번역본이지만) 여러 번 통독했다고 알려진 신봉승 작가나 총 20권의 역사만화로 펴낸 박시백 작가 등이 대단하다고 했다. 웹툰 ‘조선왕조실톡’ 등의 예를 들면서 보다 캐주얼한 콘텐트가 나오길 희망한다고도 했다.

 

 역사 공부라는 게 우리가 그 시대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져 왔는지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될 시대상에 기준을 제시해 주잖아요. 특히 실록에 나타난 조선의 외교를 보면 오늘날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과 비교해 눈여겨볼 점이 많은데, 안타깝게도 학계의 논문으로만, 조선시대사 전공자들의 전유물로만 인식되는 것 같아요. 새로운 번역이 더 많은 분의 문턱을 낮춰주길 기대합니다. 

AI 번역 채비 단계…감수할 고급 인력 양성 과제

실록의 인공지능(AI) 번역 가능성도 있을까. 이에 대해 번역자들은 조심스러운 낙관을 내놨다. 현재 여러 기관에서 모델 개발에 뛰어들었고 번역 데이터가 많이 축적되면서 산출값이 어느 정도 나오는 단계라고 한다. 예컨대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선 ‘한문고전자동번역(시험판)’이 시범 운용되고 있는데 승정원일기와 천문고전 원문을 집어넣으면 한 번에 원문 300자까지 자동 번역된다. 다른 고전문헌 원문을 넣을 경우엔 번역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일성록은 1760년(영조 36)부터 1910년까지 조선후기 151년간의 국정 운영 상황을 정리한 일기 형식의 국가 기록물이다. 국보이자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됐다. 전체 2329책 중 영·정조대에 해당하는 677책(전체의 38%)이 2015년 185책에 번역돼 나왔고, 이후로도 계속 번역 출간되는 중이다. 중앙포토

 

“10년 전만 해도 역사 문헌을 AI로 번역한다는 게 택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옛날식 한문에다 현대적인 우리말 어순·문법까지 고려하면 데이터가 아주 많이 쌓여야 하니까요. 자동번역기 개발에 필요한 코퍼스(corpus·말뭉치)를 산출하기까지 한문 번역은 아직 제약이 있습니다. 결국 수준 높은 AI 번역을 위해서라도 질 높은 번역문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김현재)

설사 자동번역 시대가 온다 해도 최종적으로 감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AI보다 높은 수준의 문리(文理)를 지닌 연구원이 ‘매 같은 눈’으로 오류를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렇게 고전과 한문, 역사에 두루 해박한 인력이 예전처럼 많지 않고, 제대로 길러내려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1차 완역 때는 정부 차원에서 힘을 쏟았는데도 4반세기가 걸렸잖아요. 이번에 번역 현대화 사업은 그보다 빨리 진행하려고 계획했지만, 실제 해 보니 예산을 포함해 여러 변수들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풍토와 인식에서 고급 인력이 이 분야에 뛰어들지 않는 거죠. 책임감을 갖고 사업이 속도감 있게 마무리되길, 참여자로서 기원합니다.”

서울 은평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만난 김옥경 고전번역실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책임연구원, 김현재 조선왕조실록번역팀장, 최소영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연구원(왼쪽부터). 김종호 기자

 

일제 때 반출된 오대산사고본 실록·의궤, 110년 만에 ‘귀향’

 조선 전기의 승정원일기는 단 한 부도 전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다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반면에 실록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승정원일기는 애초에 필사 원본 한 질뿐이었지만 실록은 만약을 대비해 여러 질을 찍어 보관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왕실은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태조실록』~『명종실록』)을 바탕으로 실록을 총 4질 제작했다. 원본인 전주사고본은 강화도(마니산)에 봉안하고, 새로 편찬된 4개 실록은 춘추관을 비롯해 묘향산(평안북도 영변군), 오대산(강원도 평창군), 태백산(경상북도 봉화군)에 봉안했다. 실록 외에도 국가와 왕실의 중요 서적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조치로 깊은 산속에 수장고(외사고)를 설치한 게 특징이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자락에 위치했던 오대산사고 모습. 한일강제병합 전까지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등을 보관한 4대 외사고 중 하나였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유리건판 자료)

 

‘이괄의 난’(1624)과 병자호란까지 겪은 뒤 조선 후기의 실록 보관은 최종적으로 춘추관과 4대 외사고로 정리됐다. 각각 태백산, 정족산(인천 강화군), 적상산(전북 무주), 오대산 사고다. 이 가운데 춘추관사고본은 이괄의 난으로 일부 소실됐다는 기록 외에 전하는 흔적이 없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직후 사고는 모두 폐지되고, 각 사고에 있던 실록과 의궤, 각종 서적들도 모두 경성(서울) 안으로 옮겨왔다. 이들 장서들은 조선총독부를 거쳐 대부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과 창경궁 장서각에 나뉘어 보관됐다. 그러나 오대산사고본 실록 전권(788책)은 도쿄제국대학 요청으로 의궤와 함께 1913년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렇게 반출된 장서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불타 없어졌다. 다만 당시 외부로 대출된 일부가 살아남아 1932년 5월에 27책이 경성제국대학으로 반환됐다.

 

해방 후 이들 장서들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으로 이관, 관리돼 전해졌다. 이 가운데 적상산사고본 실록은 6·25전쟁 당시 인민군이 가져갔다. ㊤편에서 전술했다시피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1990년 『리조실록』 400책을 완간했다.

 

이후 오대산사고본 가운데 살아남은 책이 일본 도쿄대에 추가로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민간과 불교계, 정부의 갖은 노력 끝에 2006년 11월에 나머지 47책이 서울대학교에 기증 형식으로 반환됐다. 2011년엔 의궤 82책도 반환됐다. 2017년 일본에서 실록 1책(효종실록)이 추가로 매입·환수됐다. 이들은 2023년 11월 12일 오대산에 정식 개관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서 소장·관리하게 됐다.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에 문을 연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전경. 사진 문화재청

 

에디터

  • 강혜란

    관심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팩트와 ‘갬성’ 두바퀴로 움직이는 ‘글로생활자’. 칼럼 ‘쇼미더컬처’를 연재합니다.
  • okmi**** 2023.11.22  11:35

    이런 정도 기사내용이 되어야 읽을 맛이나죠. 좋았습니다!

    좋아요5화나요5
     
  • film**** 2023.11.16  09:33

    흥미진진... AI가 번역을 척척해내는 수준이 되면 더 재미있는 내용들을 볼 수 있겠네요.

    좋아요57화나요11
     
  • ww21**** 2023.11.16  09:04

    조선 태조 이성계부터 25대 철종 때까지의 아주 방대한 사실들을 꼼꼼하게 적은 조선왕조실록을 만든 조선 왕조의 사관들은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고 조선 왕조 실록을 만든 것은 조선 왕조의 대단하고 훌륭한 업적이다.

    좋아요118화나요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