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 Human Geography

윤이상 선생(尹伊桑 1917~1995)과 통영국제음악당

Jimie 2024. 5. 12. 18:03

류지미 2023. 9. 8. 10:46

 

상당히  불그스레한  사상과  친북 성향의   행적

자유대한민국 민주 공화국  보다  세계 최악의  공산 독재정권  북한에 경도된~...

반공방첩의 국가 보위 -조국  현실에 적의 처신했어야 현명하였다 하겠거늘.... 

윤이상 선생(尹伊桑 1917~1995)

 

 

일제강점기인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태어났다. 흔히 통영군이 윤이상의 고향으로 언급되지만, 호적 기록에 따르면 산청으로 되어 있다. 단 당시에는 여성이 출산 전후에 친정에 머무르는 관습이 있었으며, 산청은 윤이상 모친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생후 3년 뒤 4살 되던 1920년 가족들과 함께 통영군으로 이주했고, 서당과 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윤이상은 스스로 자신의 고향을 충무(통영)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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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와  음악학원에 입학하여 첼로 작곡, 음악이론 등을 배웠다.

 

1936년 가족사로 귀국하였고,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공장에서 일하다가, 

1938년 통영 화양학원(현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잠시 생활을 하였다.
1939년에 다시 도쿄 유학했고, 프랑스 근대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이케노우치 토모지로(池內友次郞)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작곡 활동을 틈틈이 하는 한편 항일 지하조직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4년 7월 불법 무기 제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고문을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2개월의 단기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경찰의 감시를 피해 경성으로 옮겨가 인쇄소 식자공 등으로 연명했고,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가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부산고 등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했으나, 투옥과 오랜 도피 생활로 얻은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6.25 전쟁 때는 투병 경력 때문에 징집에서 제외되었고, 계속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전시작곡가협회와 그 뒤를 이은 한국작곡가협회에 입회했다.

 

휴전 후 가족들과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작곡 교사로 활동하면서 잡지나 신문에 음악 관련 기고문을 발표하거나 실내악 작품을 쓰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55년에 현악 4중주 제1번과 피아노 3중주 두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상금과 기타 여비를 더해  1956년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에 유학갔다가 

 

1957년에 다시 서독 서베를린으로 옮겨 베를린 고등음악학교(현 베를린 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12음 기법, 작곡을 배웠다. 이 때 스승들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실링과 요제프 루퍼, 보리스 블라허가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1959년 그에게 접근한 동독 스파이 소녀에 의해서 북한과 접촉이 시작되었다. 그 소녀는 동독에는 많은 북한 사람들이 유학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했고, 윤이상은 통영과 일본에서 함께 음악을 공부했던 절친한 친구였던 음악가 최상한의 안부를 물어봤다. 최상한은 공산주의에 심취했고, 윤이상 종종 그와 논쟁을 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전쟁 때 그는 월북했다. 이후 윤이상은 동독 및 북한과 접촉했고, 동베를린 대사관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북한 체제선전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쾰른 정주 시절인 1963년 4월,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에서 윤이상은 조선국립교향악단 콘트라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친구 최상한을 만났다. 북한에서 윤이상은 강서고분에서 사신도 벽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영상'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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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었고, 다른 독일 주요 교포 인사들과 함께 고문을 당한 뒤 북한의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심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동백림 사건). 그러나 2심과 3심을 거쳐 간첩 혐의는 무죄로 판결나고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동조죄 및 탈출죄)으로 징역 15년으로 감형, 대법원에서 10년형으로 확정되었다.

 

1969년 석방되어 서독으로 돌아간 2년 뒤 가족들과 함께 서독 국적을 취득했다.

 

동백림 사건은 윤이상이 피해자임이 확실하지만, 윤이상이 독일로 건너간 이후의 사회 활동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서독에서 생활하던 중인 1959년 동독 스파이 소녀가 그에게 처음 접근한 이래, 그는 동독과 북한 인사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1963년 옛 친구와 서대묘의 사신도를 보기 위해 처음으로 북한에 다녀왔다. 그런데 윤이상의 북한행은 동백림 사건 당시 그를 납치하려고 독일에 간 중앙정보부 요원들조차 몰랐고, 이것이 대한민국 언론에 퍼진 것은 재판 과정의 보도 때였다. 가시지 않은 한국전쟁의 상처와 냉전으로 인한 반공주의가 강화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무슨 목적이었건 북한에 갔다는 사실은 문제로 여겨졌다.

 

그는 첫 방북 당시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실제로 김일성 주석이 와서 말하면 거대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단지 멀리서 그를 볼 수 있을 뿐인데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민중은 전쟁 후 오랫동안 굶주리고 빈곤하여 잠을 잘 다락방도 없었지요. 그런데 김일성이 모든 것을 지도하여 그들이 더 이상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도록 했으며 집도 지어주었습니다. 그것도 옛날의 오두막집이 아니라 진짜 기와집을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의심할 나위 없이 많은 성과를 올렸고 지도자의 자격을 증명했으며 또 개인적인 위광을 과시했습니다.

윤이상-루이제 린저 대담, 상처 입은 용, 1988

1979년 이후에는 거의 매년 북한을 방문하여 한달 이상 장기 체류하곤 했다.[21]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윤이상은 다음과 같은 조전을 북한에 보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과 이 몸이 산산이 쪼각 나는 듯한 비통한 마음으로 위대하신 수령님의 서거의 통지를 접하고 허탈 상태에 있는 이 몸이 병중에 있으므로 달려가 뵈옵지 못하는 원통한 심정을 표현하며 전 민족이 한결같이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이신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하여 하루빨리 통일의 앞길을 매진할 것을 확신합니다. - 1994.7.9 빠리에서. 치료 중에 있는 윤이상 부부

1995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은 지 1년이 되자 윤이상은 병상에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서거 1돐을 맞이하여 그 영령 앞에 심심한 애도와 흠모를 절감하오며 길이길이 명복을 비옵니다. 끝없이 우리 민족의 광영을 지켜주소서. - 도이췰란드 베를린의 병원에서 윤이상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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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석방되어 서독으로 돌아간 2년 뒤 가족들과 함께 서독 국적을 취득했다.

 

1972년에 모교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작곡과 명예 교수가 되었고, 뮌헨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를 위해 오페라 '심청' 을 작곡해 초연했다. 서독 외에도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작품이 연주되었고, 1977년에는 서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 '광주여 영원히!' 라는 관현악 작품을 발표했다.

 

1994년에 예음문화재단 주최로 남한에서 '윤이상 음악축제' 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 남한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여 귀국 계획을 접어야 했다. 또한 과거 그의 정치적 행보들이 조명되며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모든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고법 형사5부(서승렬, 안승훈, 최문수 부장판사)는 2023년 5월 12일 유족들의 청구를 받아들여 윤 씨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2020재노25). 재심이 청구된지 3년 만이다. 

 

 

 동백림 사건은 윤이상에게 육체적/정신적인 상처를 남겼고, 이 때를 전후해 당뇨병을 비롯한 여러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폐렴이 재발하여 1995년 11월 4일에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타계 23년 만에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 2018년 3월 20일 통영국제음악당 부지 내에 안장되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그의 귀국을 불허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 정부는 그의 귀국을 막지 않았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몇 차례 윤이상의 귀국을 초청했다. 하지만 윤이상 본인이 이를 거절했다.

 

1982년에 대한민국 음악제를 통해 윤이상 작품만으로 꾸며진 연주회가 두 차례 열리기도 했지만, 윤이상은 계속해서 전두환 정부의 초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윤이상의 이런 친북적 행적으로 인한 입국 금지는 '문민정부' 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민주화를 이룩한 조국에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윤이상은 정부로부터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이라 했던 것을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자 이를 거부했다.

 

하여간 윤이상 개인으로도 김영삼 정권 당시 귀국에 대한 논쟁은 자신이 믿고 지원했던 재야 인사들까지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된 셈이었다. 이는 결국 건강 악화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낳았고, 결국 정치 활동 포기 선언을 하고 고향 땅도 영영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통영시에서는 해마다 윤이상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통영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있고, 윤이상의 이름을 딴 국제 음악콩쿠르나 작곡 경연도 열리는 등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완전히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타계 23년 만에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 2018년 3월 20일 통영국제음악당 부지 내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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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김춘수, 박경리, 김상옥으로 대표되는 통영의 문학적 전통과 함께 통영을 위대한 예술혼의 도시로 만든 이를 꼽으라면 단연 세계적인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꼽겠다. 

 

통영이 고향인 윤이상 선생(尹伊桑 1917~1995)은  해방 직후 통영공립고등여학교와 통영공립여자중학교의 음악교사로 재직하면서 동향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그리고  청록파 시인 조지훈 등  당대 최고의 시인들로 구성된 통영문화협회원들과  함께 ‘교가 지어주기’ 운동을 펼쳤다.

 

.윤이상은 통영에 머물던 1945년부터 1949년까지 통영초등학교를 비롯 두룡, 용남, 원평, 유영, 진남, 충렬, 광도초등학교와 욕지중학교, 통영여중고, 통영고등학교 등의 교가를 윤이상이 직접 작곡했다. 통영의 통영, 충렬, 두룡, 진남, 용남, 원평초등학교와 욕지중, 통영여중고, 통영고 등 9개 학교와 부산고등학교  등의 교가가 모두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이며

 동아대 교가는 김상옥 시에 ,고려대와  경주중고의 교가는 조지훈이 쓴 노랫말에 그가 곡을 붙인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서양 현대음악에 접목시킨 작품으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음악가 윤이상 선생이 작곡한 교가는  부산고등학교, 부산 양정고, 마산고, 경주고, 경주박물관학교, 동아대학교, 고려대학교, 등을 합치면   30여 개 교가에 이른다.

 

세계적인 작곡가, 음악 거장이기에 앞서 통영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만들어 낸 교가들이어서 노래들은 한 결 같이 따뜻하고 고향 사랑이 가득 묻어나면서도 뛰어난 음악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긴긴 타향살이 끝에 결국 고향 땅을 밟지도 못한 채 숨을 거두었지만 유언에 따라 고향 땅 통영에 묻혀 영원히 잠이 든 윤이상. 정겨운 오르골 소리로 듣는 그의 작품들은 그 속에 그의 통영 사랑 정신을 담아 둔 것 같아 더욱 의미가 크다 하겠다.

 

 통영에선 그를 기리기 위해 매년 봄과 가을에 통영국제음악제를 개최해 그의 친구 또는 제자들이 그의 곡을 연주한다. 도천동에 있는 선생의 생가 앞 도로는 ‘윤이상 거리’가 되었고, 입구에는 그를 추모하는 흉상이 서 있다. 거리 가운데 있는 페스티벌 하우스에서는 윤이상 선생과 관련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페스티벌 하우스 내 프린지 홀에서는 수시로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암울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간첩으로 몰려 죽기 전에 고향 땅 한 번 밟아보지 못 했지만, 그 시절 그는 비록 잊혀졌지만, 그의 노래는 고향땅에서 후배들의 입을 통해 불리어져 오고 있다.

 

2018년  3월 25일 13시 5분, 김해공항을 통해  귀향한 선생의 유해는 생전 그의 바람대로 통영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파도소리가 들리는 통영국제음악당 마당, 너럭바위 아래에  안치됐다. 사후 23년 만의 귀향이었다. 연꽃을 이르는 ‘처염상정(處染常淨)’ 네 글자가 흘려 새겨진 바위는 “할 일을 모두 끝내고 통영 앞바다에서 물고기나 낚겠다”던 그의 유언처럼 통영 바다로 애절한 마음을 흘려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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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국제음악당

~갈매기 두 마리가 하늘로 비상하는 외관 ~

 

경상남도 통영시 도남동 1번지  2010년 10월 개관

 

 

 

윤이상 통영국제음악당, 음악가-어린이 훈훈한 협연

입력 2022. 8. 5. 10:18수정 2022. 8. 6. 05:28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통영국제음악당에는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세기의 작곡가 고(故) 윤이상(1917~1995)의 족적이 아로새겨진 곳이다.

통영국제음악당

생전의 윤이상씨

 

세계 음악계에서는 20세기 최고로 추앙받는데, 유독 한국에서는 없는 얘기를 지어내면서 색깔론을 뒤집어 씌우는 바람에, 귀국을 거부당해, 베를린에 13년간 묻혀있다가 2018년에야 고향 통영에 돌아왔다.

 

그는 청록파 유치환, 미술가 전혁림, 순애보 시조시인 김상옥, ‘꽃의 시인’ 김춘수 등 문화예술인과 통영문화협회를 이끈 인물이다. 그리고 유학을 떠났다. 군사정권에겐 반공 조작이 필요했고 밖에서 예술혼을 불사르던 윤이상 등 우리의 해외 문화예술인들이 희생양이 됐다.

 

이런 터무니없는 누명 속에 1995년 윤이상이 이국땅에서 숨지자, 문화협회 막내이던 김춘수(1922~2004)가 각혈의 고통 속에서도 선배인 화가 전혁림(1916~2010)을 찾아가, “형님 이제야 통영문화협회가 부활할 모양입니다”라고 울먹인 바 있다. 김춘수는 정식회원이 아니던 박경리(1926~2008)가 오라버니로 여기며 선교사집 등에 따라다니던 통영 문학인이다.

 

1972년 뮌헨올림픽 메인테마곡 ‘심청’ 작곡, ‘베를린 필하모닉’의 탄생 100주년 기념곡인 ‘교향곡 1번’ 작곡, 독일 공영방송 선정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중 한사람’,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 선정 ‘유사 이래 최고의 음악가 44인(20세기 1인=윤이상)’ 등 위대한 족적을 쌓은 인물이다.

후배들이 그를 기리며 지은 곳이 바로 통영국제음악당이다. 유네스코는 윤이상의 탄생지라는 점, 통영국제음악당이 아시아 중요한 음악의 메카라는 점 등을 근거로 통영을 ‘창의음악도시’로 지정했다. 

 

‘설렘팡 희망톡 콘서트’ 음악 대가들과 함께 공연할 기회를 가진 어린이 뮤지션·아티스트들의 밝의 표정

 

그간 숱하게 의미있는 행사를 했던 통영국제음악당이 지난 2일 시작해 5일까지 2022 꿈의 오케스트라 ‘설렘팡 희망톡 콘서트’ 개최하고 있어 다시 한번 마음이 뭉클해진다. 꿈을 키우는 아이들과 음악 대가들의 협연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보균)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원장직무대리 박창준)이 주관하는 행사이다.

2022 꿈의 오케스트라 〈설렘팡 희망톡 콘서트〉는 꿈의 오케스트라 12년차를 맞아 진행되는 최초의 협연 프로그램으로, 꿈의 오케스트라 총 14개소 약 1000여 명의 아동, 청소년 단원들이 저명한 아티스트와 협연 무대를 함께 한다.

지난 2일부터 통영국제음악당에서 개최된 〈설렘팡 희망톡 콘서트〉는 고창, 부산 동구, 목포, 세종, 원주, 평창, 광주 남구, 창원 등 8개 거점기관의 아동·청소년 단원 약 500여 명이 참여하여 진행해오고 있는 마음 푸근한 음악회이다.

부산동구 어린이 음악가들

 

협연 무대에는 KBS FM 〈송영훈의 가정음악〉 진행자로 활동 중인 첼리스트 송영훈이 꿈의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와 영화 〈웰컴 투 동막골〉 OST로 잘 알려진 히사이시 조의 ‘Waltz Of Sleigh’을 연주하며 아름다운 하모니를 선사했다. 또한 공연이 끝난 후, 단원들과 음악인으로서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며 소통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협연 무대를 마친 첼리스트 송영훈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자리였고, 이 노력의 결과물이 정말 감사하고 만족스럽다. 앞으로 꿈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더 많은 청중들을 만나 선한 영향력과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음악 전령사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참여 소감을 전했다.

송영훈과 협연하는 꿈의 오케스트라 단원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제공]

 

협연 프로그램 외에도 꿈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음악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이색적인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됐다. 국내 최초 바디뮤직퍼커션 그룹 바디뮤직코리아가 함께한 리듬 만들기 워크숍에서는 단원들이 직접 신체활동으로 다양한 리듬을 만들어 발표하며 창의력과 음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편, 오는 16일부터 18일까지 아트센터 인천에서 개최되는 ‘설렘팡 희망톡 콘서트’에는 공주, 통영 , 군포, 강릉, 성북, 오산 등의 6개 거점기관 아동·청소년 단원 약 500여 명과 저명 음악가 대니구(바이올린), 홍진호(첼로), 이석준(호른)이 함께할 예정이다.

 

abc@heraldcorp.com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고려대 교가는 '빨갱이 노래'인가

성우제 2009. 7. 19. 00:56

 

 1979년 고교에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음악시간에 교가와 응원가를 배웠다. "얼싸~ 좋구나 빅토리 빅토리"로 시작되는 <제1응원가>를 가르치던 음악 선생님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 이 노래 작곡자는 윤이상이라는 분인데, 지금 서독에서 세계적인 작곡가로 활동중이시다. 그 분이 작곡한 오페라 <춘향>은 수십분에 걸쳐 기립 박수를 받았다. 밖에 나가서는, 학교에서 이 이야기 들었다고 절대 말하지 마라."
  나는 음악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저 이야기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나고 보니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1979년 봄, 철없는 고교 1년생들에게 윤이상씨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안기부에 끌려가 물고를 당하고 교단에서 쫓겨나고도 남을 행위였다.
  그렇다고, 그 유명한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도 퍽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당시 바깥에 나가 저 이야기를 한 제자들이 없어서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그 선생님은 '무사'했다.

  나는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고교 음악 시간에 처음 들었다. 훗날 기자가 되고 난 후에 보니, 문화예술 기사에서 윤이상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이자 반드시 풀어내야 할 화두였다. 

 

  1994년 우리 회사에서 <윤이상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기획의 핵심은 두 가지. 첫째는, 국내 음악인들이 윤이상의 음악을 일주일에 걸쳐 집중, 조명하는 것. 두번째는, 윤이상씨의 귀국이었다. 

 
                         작곡가 윤이상(1917~1995)
 
  한국 음악계는 들썩였다. 윤선생 앞에서 연주를 한다는 사실에, 그해 여름 그 뜨거운 삼복더위에 아랑곳 않고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여 연습에 몰두했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를 준비하는 한편으로, 윤이상씨 귀국 절차는 조용하지만 정교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윤이상씨의 귀국에 반대를 하지 않았다.
  선배 기자 두 사람이 유럽에 특파되어 윤이상씨를 직접 인터뷰하는 사이에, 나는 국내 음악인들의 준비 과정을 취재했다. 음악가들은 정치색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은 음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윤이상 페스티벌에 연주자로 참여하는 것은 큰 영광"이라고 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국 최고의 연주자들이었다. 그들은 생존한 현대 음악의 거장을 모국에서 맞이하는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했다. 정치니, 분단이니 하는 것과는 아랑곳없이, 다름아닌 '모국에서 저주받은 전설'을 맞이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전율하다시피며 연습에만 줄창 몰두했다. 
  작고한 김용윤 예음문화재단 이사의 활약은 눈부셨다. 윤이상 선생의 귀향은, 청와대와 의견을 조율해 가며 물흐르듯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귀국 날짜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점에 돌연 대형 사건이 터졌다. 그 일로 인하여 윤선생의 귀국은 하루아침에 취소되었다. 음악인들은 눈물을 뿌렸다. 그들은 주인공 없는 페스티벌을 말없이 진행했다. 그것은 뭐라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절망이었다.
 
  노 작곡가 윤이상씨의 귀향을 가로막은 것은, 느닷없이 나온 보수 신문들의 사설이었다. 2개 신문이 사설을 썼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제목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윤이상씨의 경우.'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윤이상씨는 빨갱이". 이 사설들로 인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윤 선생은 그 이듬해 독일에서 작고했다. 1967년 빨갱이로 '몰려' 고국에 끌려와 옥고를 치르다가 서방 예술가와 정치가들의 구명 운동으로 독일로 간신히 빠져나간 후, 단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2000년 2월 윤이상씨의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 현대음악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그 음악제는 통영 출신인 윤이상씨를 추모하고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평생 고향의 쪽빛 바다를 그리워하던 선생은, 이렇게 음악으로 귀향했다. 그리고 현대음악제를 기점으로 윤이상 선생에 덧씌워진 모든 것이 풀린 듯했다(아래 상자에 당시 기사가 있다).
 
백남준과 윤이상 : 20대 때 다름슈타트음악제에서 만나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백남준이 세계 미술계의 산봉우리라면 윤이상은 세계 음악계의 거대한 산맥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 내 친구 김훤주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http://2kim.idomin.com/1016
글의 요지는, 윤이상국제음악당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이름이 통영국제음악당으로 바뀌고, 나오기로 했던 국가와 도 예산이 모두 취소되었다는 것.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은 과거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을 하는 듯이 보였다. 동백림 사건은  유럽에서 유학하던 한국의 젊은 엘리트들을 붙잡아와서 간첩 사건으로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명백백 드러났다. 국가가 인정한 사실이다. 윤이상 선생 또한 '빨갱이'가 아니라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것이 언제인데…. 지금도 빨갱이 타령을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요즘 전 세계 도시들은, 없는 작은 사실도 크게 포장하여 세계에 널리 알리고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브랜드를 찾지 못해 속된 말로 혈안이다. 윤이상이라는 이름은 세계적으로 통하는 한국의 몇 안되는 명품 중의 명품 브랜드이다. 시대착오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사실도 축소하고, 굴러온 복도 냅다 걷어차는 무지와 야만. 화가 난다기보다는 슬프다.  백번 천번 양보하여 그가 좌익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작고했고 음악만 남았다. 최소한 음악에는 '붉은 기운'이 없다.
 
  윤이상 음악에 붉은 기운이 서려 있어 그를 반대한다면,  윤이상 작곡의 고려대학교 교가는 빨갱이 노래이다. 현 대통령도 '반역자' 윤이상씨가 작곡한 그 붉은 노래를 부르며 공부했을테고, 그 붉은 노래는 지금도 불리고 있다.  내가 졸업한 고교에서도 응원가는 신나게 불릴 것이다. "닐니리 좋구나 빅토리 빅토리" 하면서….

 

 

[음악] 윤이상 추모 <통영현대음악제>

<통영현대음악제> 성황… 현대 음악 산실 가능성 보여

 

“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인,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서 나의 평생 작품을 써 왔습니다. 내가 구라파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번도 통영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파도 소리가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사진은 1994년 파리에서 찍은 생전의 모습이다. 저 때만 해도 윤 선생은 25년 만의 귀향에 퍽 행복해 했다. 저 사진을 찍은 며칠 후, 보수 신문들의 사설 2개로 현대음악의 거장은 귀향을 포기해야 했다. 그 이듬해 베를린에서 작고했다.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씨(1917~1995)가 타계하기 1년 전 조국 방문이 좌절되자 고향의 시민에게 보낸 음성 메시지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정작 그를 낳은 조국 땅을 끝내 밟지 못한 음악가, 꿈에라도 볼까 싶어 침대 머리맡에 고향 사진 5장을 언제나 붙여 놓았던 윤이상씨가 작품으로나마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 사람들은 그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음악회장을 가득 메워 40여년 만에 귀환한 예술가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지난 2월18일 오후 7시30분 <통영현대음악제-윤이상을 기리며>가 막을 연 시민문화회관 공연장은 무대부터 인상적이었다. 무대 중앙에 대형 사진으로 등장한 윤이상씨는 창원시립교향악단과 객석을 지켜보았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전설-신라> <교향곡 제2번>을 국내에서 초연한 창원시향은 정성을 다해 연주했고, 객석의 청중은 숨소리를 죽여 가며 귀를 기울였다. 

  '윤이상을 기리는’ 음악제는 다음날 독주곡 작품 및 헌정 작품 연주회, 세미나·강연·워크숍 들로 이어졌고, 20일 세계에서 처음 연주하는 작품으로 막을 내렸다. <통영 시민의 노래>는 1956년 유럽으로 건너간 윤이상씨가 1966년 유치환 시인이 쓴 가사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이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 여파로 사라질 뻔한 악보가 얼마 전에 발견되어 통영에서 처음으로 불린 것이다. 이 악보에는 ‘유치환 노래 윤이상 가락, 1966년 8월9일 미국 콜로라도 주 아스펜 음악제(로키 산맥의 산중)에서 지음’이라는 글씨가 작곡자의 친필로 선명하게 적혀 있다.

  사흘 동안 열린 <통영현대음악제>는 분단의 희생자를 명실상부하게 복권시키는 마당이자, 통영시를 음악 도시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잔치였다. 위대한 음악가를 배출한 도시는 거의 예외 없이 국제적인 음악 도시로 발돋움했다.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가 그렇고, 빈과 바르샤바는 베토벤과 쇼팽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올해 출범한 <통영현대음악제>는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윤이상이 자란 곳’이라는 자산을 바탕으로 통영시를 세계적인 음악 명소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출범한 축전이다.

  “아버지는 한평생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직접 와서 보고 아버지의 깊은 그리움을 비로소 이해했다. 아버지의 고향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이번 음악제에 참석하려고 미국에서 건너온 윤이상씨의 딸 윤 정씨는 ‘아버지는 늘 눈을 감은 채 고향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고 말했다.

  <통영현대음악제>를 주관하는 국제윤이상협회 한국사무국은 윤이상의 음악과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을 결합해 국제적인 축전으로 키워 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쪽빛 바다와 아름다운 섬으로 절경을 자랑하는 한려수도의 중심 도시인 통영은, 관광으로도 국제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청사진은 이미 나와 있다. 통영시가 지난해 9월 한국관광연구원에 의뢰한 ‘통영시 21세기 관광 진흥 종합 계획 수립 학술 연구 용역’에 따르면, ‘윤이상 선생 관련 계획안’은 세 가지로 나뉜다. 올해 처음 열린 <통영현대음악제>를 해마다 조금씩 키워 나가고, 윤이상기념관을 건립하며, 윤이상음악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통영 바다와 윤이상 음악의 환상적 결합

  <통영현대음악제>의 모델은 80년 전통을 지닌 독일의 <도나우싱겐 음악제>. 인구 4만명의 작은 도시 도나우싱겐은 해마다 현대 음악 축전을 열어 세계 무대에 데뷔하려는 현대 작곡가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등용문 구실을 하고 있다. 윤이상씨도 1966년 도나우싱겐에서 <예악>을 초연함으로써 세계 음악계에 등록했다.

  통영 연구를 담당한 한국관광연구원 허갑중 연구위원은 “출범할 당시 도나우싱겐과 비교하면, 지금 통영의 여건이 훨씬 좋다. 20년만 지나도 <통영현대음악제>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통영이 지닌 여건이란, 아름다운 풍광과 작곡가의 세계적인 명성, 통영오광대·승전무·남해안별신굿 같은 무형문화재, 윤이상뿐 아니라 김상옥·유치환·김춘수(이상 시인) 박경리(소설가) 전혁림(화가) 등을 낳았다는 예술 도시로서의 자부심이다.

  무엇보다 통영에는 윤이상씨의 체취가 그대로 살아 있다. 일본에서 유학한 그가 음악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 그의 고향이다. 그는 1937년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광복 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음악 교사에 취임했다.

  그는 시인 유치환·김춘수 씨들과 함께 1945년 9월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했는데, 그 활동의 결과가 지금도 남아 있다. ‘교가 지어주기 운동.’ 윤이상·유치환 씨는 당시 통영에 있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지었고, 통영여중고·통영고·욕지중과 통영·충렬 초등학교 등 9개 학교가 그 교가를 수십년째 불러 왔다. 동베를린 사건 이후 윤이상씨의 작품은 이 땅에서 연주할 수 없는 금지곡이 되었으나, 통영 사람들은 윤이상의 노래를 일상적으로 부르며 성장한 셈이다. 통영 시민들이 윤이상의 귀향을 각별하게 환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음악제의 장기적인 목표는 통영을 현대 음악의 산실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심은 윤이상 음악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윤이상 음악을 제대로 듣고 연구하려면 반드시 통영으로 오게끔 할 계획이다.” 음악제를 주관하는 국제윤이상협회 한국사무국장 김승근씨는 “그러나 성급하게 키울 생각은 없다. 내년까지는 소규모로 하고 2002년부터 국제 행사로 전환할 것이다. 1차 목표는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7년 100곡 전곡 연주에 도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윤이상씨의 작품은 서양 연주자가 공연 일정을 잡아놓고도 포기를 했을 만큼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궁중 음악과 같은 한국 고유의 멜로디와 리듬을 담아 ‘한국 정서를 서양 악기로 표현하게 한다’는 평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교향곡 제2번>을 초연한 창원시향 지휘자 김도기씨는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짜릿함을 맛보았노라고 말했다. 윤이상씨의 곡은 ‘결국 우리 작품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연주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제일 유명한 한국 현대 음악이라는 얘기이다. 

  작품으로 40여년 만에 귀향한 한국 출신의 이 거장은 지금 베를린 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