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미 2024. 2. 29. 17:26
순간 시청률 50%! 歌皇 나훈아가 내뿜은 압도적인 에너지
입력 : 2020.09.30
글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chosh760@chosun.com
“가수라는 무게가 무겁다. 훈장 무게를 어떻게 견디냐.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영혼이 자유로워야한다고 생각한다. 훈장을 받으면 어떻게 사냐. 아무것도 못한다. 저는 정말 힘들 것 같다. 술도 한잔 마시고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이러고 살아야한다. 훈장을 받으면 그 값을 해야하지 않나. 그 무게를 못견딘다.” (나훈아 콘서트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서)
KBS 캡처
역시 '노래의 황제[歌皇]'다운 무대였다. 압도적인 가창력과 퍼포먼스로 15년만에 방송에 출연한 가수 나훈아(羅勳兒·본명 최홍기·73)씨는 엄청난 에너지를 유감없이 내뿜었다.
30일 오후 KBS-2TV가 2020 한가위 대기획으로 마련한 나훈아 콘서트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가 방송됐다.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는 코로나19로 지친 국민을 위로하고 다시 한번 힘을 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이번 공연은 지난 23일 언택트(비대면)로 1000명의 온라인 관객을 모아 진행했고, '고향' '사랑' '인생' 총 3개의 주제로 구성됐다.
이날 방송은 순간 시청률 50%를 상회했다. 스마트폰을 매개로 한 각종 미디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공중파 방송 시청률이 50%를 넘긴 경우는 매우 드물다. 데뷔 54년이 지났음에도 나훈아씨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훈아씨는 '무시로' '울긴 왜 울어' 등 왕년의 히트곡은 물론 신곡 '테스형!' '명자' 등 다채로운 노래를 선보였다. 나씨는 콘서트 도중 그만의 독특한 명언(名言)도 쏟아냈다.
코로나19와 관련해 “우리에게 영웅들이 있다. 코로나 때문에 이렇게 난리를 칠 때 우리 의사, 간호사 여러분, 그 외의 관계자, 의료진 여러분들이 우리들의 영웅이다. 이분들이 없었으면 우리는 이 것을 어떻게 헤쳐나가겠나”라고 말했다.
나씨는 훈장(勳章)을 사양한 이유에 대해 “가수라는 무게가 무겁다. 훈장 무게를 어떻게 견디냐.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영혼이 자유로워야한다고 생각한다. 훈장을 받으면 어떻게 사냐. 아무것도 못한다. 저는 정말 힘들 것 같다. 술도 한잔 마시고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이러고 살아야한다. 훈장을 받으면 그 값을 해야하지 않나. 그 무게를 못견딘다”고 했다.
'신비주의자'라는 세간의 평에 대해서도 일축했다. 그는 "나보고 신비주의라더라. 신비주의라뇨. 가당치 않다. 어떻게보면 언론에서 만든 이야기"라며 이렇게 말했다.
"가수들이라고 하면 저는 꿈을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꿈이 가슴에 고갈이 된 것 같아서 11년동안 여러분 곁을 떠나서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랬더니 잠적했다하고 은둔생활 한다하고 별의별 소리를 다하죠. 이제는 뇌경색에 말도 어눌하게 하고 걸음도 잘못걷는다고 하니까 내가 똑바로 걸어다니는게 미안해 죽겠다.”
나훈아씨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본따 지은 신곡 '테스형!'을 내놓은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주름을 생기는 원인이 스트레스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있다. 신곡 제목인 테스형에게 세상이 왜 이러냐, 세월은 왜 흐르냐고 물어봤다. 테스형에게 물어봤는데 모른다더라. 이왕 세월이 흐르는 거, 우리가 끌려가면 안 된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
나훈아씨는 노력파 가수다. 2002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나는 노래를 못하니까 연습을 해야한다"며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씨는 또 '트로트의 황제'라는 평가에 대해 "보통 나훈아도 어려운데 황제는 무슨 황젭니까!"라고 반문했다. (인터뷰 기사 전문 하단 전재)
한편 오는 10월 3일 밤 10시 30분에는 '대한민국 어게인' 콘서트 뒷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스페셜-15년만의 외출'이 KBS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보통 나훈아도 어려운데 황제는 무슨 황젭니까!"
(2002년 1월호 월간조선 인터뷰)
2002년 1월호 <월간조선> 인터뷰 기사
『나는 노래를 못하니까 열심히 한다』
羅勳兒씨(본명 崔弘基·54)의 별명이 「트로트의 황제」라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어와서, 내 생각엔 그가 어디에선가 꼭 황제처럼 차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고 그저그런 3층 빌딩의 꼭대기 사무실에 보통사람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빨간 티셔츠만 아니었다면, 그저 눈이 크고, 눈썹이 짙고, 턱수염이 희게 센, 좀 별난 보통사람일 뿐, 연예인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실엔 흰색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또 그의 책상 옆엔 기타가 대여섯 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 것들이 그가 음악 하는 사람임을 새삼 일깨워줬다. 그러나 그의 방은 꼭 IT 회사의 CEO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사실 그는 연예인이 아닌 음반 업계에서는 「崔회장」으로 통한다고 한다. 그곳이 그의 사업을 총괄하는 我羅企劃 회장실이었다.
커튼이 쳐있지 않은, 밝고 큰 유리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한 무더기 쏟아져 들어와서, 그의 상반신에 멋진 하이라이트를 만들어 놨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얘깃거리가 됩니까?』
―되고도 남지요. 아주 특별한 분 아닙니까?
그는 이 말에 곧바로 반격했다.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아주 보통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서부터 얘기는 술술 풀려나갔다.
『지방에 공연을 가면 가수들이 거의 연습을 하지 않는답니다. 저는 밴드가 거의 초죽음이 되도록 연습을 합니다. 그러면 밴드들이 「다른 가수들은 악보만 갖다주고 그냥 무대에 올라갑니다. 그럼 그냥 하는데예」 그래요. 그럼 나는 이럽니다. 「이 사람들아, 그런 가수들은 노래를 잘해서 그래도 되지만, 나는 노래를 못하니까 연습을 해야지!」 그러면 아무 소리도 못해요. 이렇게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이 하는 겁니다.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래서 羅勳兒씨가 여기까지 왔다 싶었다. 그래도 좀 어깃장을 놔 봤다.
―사실 그 말도 맞네요, 밤낮 하는 일이니까. 그 사람들은 눈감고도 할 텐데요 뭘!
『악보만 읽고 멜로디를 연주하는 건 고등학교 밴드부도 할 수 있어요. 멜로디 뒤에 있는 걸 읽어야지 프로페셔널입니다. 진정으로 음악 하는 사람들은 멜로디 뒤에 있는 걸 읽고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연습을 할 때, 「난 여기서 이렇게 부를 테니까 느그는 여기서 이렇게 해줘」 하고 맞춥니다』
―羅勳兒씨도 그렇게 노래 많이 했으면 더 연습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지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35년간 노래를 하긴 했어도, 전에 노래한 건 정말 모르고 한 겁니다. 지금도 제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이제 막 알기 시작한 단곕니다』
나는 羅勳兒씨를 만나러 오면서도, 그가 성공에 도취한 건방진 연예인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적잖이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를 듣고 보니 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名譽의 殿堂도 勳章도 싫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한번도 연습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가는데 羅勳兒씨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그게 무서운 겁니다. 전 프로지 않습니까? 프로는 프로 값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돈을 받고 노래합니다. 받은 값을 해야지요. 값은 그냥 안 나옵니다. 피나게 연습을 해야만 특별한 게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 노래를 듣는 분들한테 감동을 줘야 합니다. 노래 한 곡이 대개 3분간 나가는데, 이 3분 안에 감동을 주려면 참말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감동을 주는 「나만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간단했다.
『연습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이런 면도 있습니다. 羅勳兒씨가 너무 연습을 많이 해서, 감정적으로, 또 기교에 있어서 완벽하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우리 같은 사람은 따라 부를 수가 없어요.
『너무 잘 하시면 안 되지요. 그러면 저하고 자리를 바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큰일 나지요』
우리는 하하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나는 그 날(12월6일) 새벽 MBC TV에서 본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그 프로그램에서 명예의 전당(가수 부문)에 올라갔던 것이다.
―내가 듣기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걸 스스로 반대했다던데요.
『그렇죠,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식은 땀이 났어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그렇게 거북할 수가 없었어요』
―무엇 땜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런 자리는 저희 선배들께 드려야 할 자립니다. 금년의 인기 가수를 뽑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런 거 안 받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왜 나갔어요?
『MBC에서 미리 선전(예고)을 해놨어요. 그랬는데 내가 안 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를 거 아입니까. 그렇다고 기자회견 할 만한 일도 아니고』
―훈장도 언제 사양했다던데요.
『그런 거 얘기할 자리도 아인데…. 사실 한 두어 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盧泰愚 대통령 때였는데요, 그것도 문제가 좀 있지요. 내가 받을 수 있을 때 같으면 받아도 괜찮지요』
―안 줘서 한인데, 주면 얼른 받지 뭘….
『아니죠. 찬물도 아래위가 있는데, 제 차례가 아니지요』
―그런 게 年功序列(연공서열)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 긴 세월을 몸을 바쳐 노래해 오신 분이 많은데, 눈에 보이는 부분만 가지고 얘기하면 안 되지요. 저는 지금 그런 거 받으면 안 됩니다. 그냥 나훈아 하는 것도 어려워요』
―그냥 나훈아란?
『그냥 노래하고, 힘들면 술도 한 잔 먹고, 실수도 하고…. 그런데 훈장 받으면 값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받는 건 좋을 지 몰라도 그러고 나선 난 어떡하란 말입니까? 지금도 그런 거 생각하면 그냥 뒷골이 땡겨요. 우리 선배님들은 참 고생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지금 젊은 가수들 히트 하나 하면 수십 억을 법니다. 우리 선배님들은 그렇게 히트 곡을 많이 가지고 계신데도 밥도 못 먹고, 제대로 잘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불러온 분들입니다. 그렇게 해 온 선배님들이 계셔서 오늘 우리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을 못 본 체하고 제가 훈장을 받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요? 말도 안 되지요!』
『뽕짝은 영원하다』
―오늘 새벽 MBC TV를 보니까 GOD와 함께 출연하셨던데, 요즘 젊은 사람들 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단 이것도 한 유(類)의 노랩니다. 이걸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나쁘다, 이렇게 평하면 안 됩니다. 유행가(流行歌)가 뭡니까? 흘러(流) 가는(行) 노래(歌)입니다. 흘러가는 노래 중에 이런 노래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요즘 젊은이들이 50∼60세쯤 됐을 때도 요즘 그런 노래를 부르며 좋아할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제가 디너쇼를 하면 표(한 장에 보통 15만원)가 사흘 안에 다 팔립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직도 뽕짝 이기(이게) 힘이 있는 깁니다. 뽕짝은 영원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회사에 들어가면 노래방 가서 무슨 노래 부르는지 아십니까? 뽕짝을 불러요. 젊은 사람들이 잠시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나이 좀 묵고 그러면 「영영」, 「무시로」 이런 내 노래로 돌아오는 겁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뽕짝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뽕짝론은 계속됐다.
『우리 노래가 뽕짝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밥 먹고 나서, 아니면 술 한잔 먹고 나서, 기분이 좋으면 젓가락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춥니다. 여기에 (실제로 손으로 장단을 치며) 가장 잘 어울리는 리듬이 뽕짝입니다. 밥도 먹었으니 배도 부르고, 술도 한잔 먹었으니 기분 좋죠. 그럼 장단 맞춰 흥얼거리며 노래를 하는 겁니다. 이기 바로 뽕짝입니다』
얘기가 미국으로 건너뛴다.
『미국에선 뽕짝이 나올 수가 없어요. 미국 사람들은 땅이 하도 넓어서 말을 타고 다니게 돼 있어요. 그래서 말 잔등 위에서 말발굽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릅니다. 떠그덕, 떠그덕, (노래부르며) 「아이 원어 고 홈」…. 이게 미국 뽕짝이에요.
반면 우리는 걸어다녔어요. 걸어다닐 때의 리듬이 또 바로 뽕짝이에요. (발바닥 장단을 치며)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그런데 지금 집은 없어도 차는 갖고 있는 시대가 됐어요. 그래서 우리 뽕짝도 달라지고 있어요. 조금 리듬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지금 자동차의 평균 속도가 시속 40km라면, 차를 달리면서 카세트를 들을 때, 그 속도에 어울리는 리듬이 돼야 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빨라지거나 아니면 그 리듬에 맞게 완전히 느려지거나…』
―요즘 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걸 우리 한국 문화라고 할 수는 없지요. 미국에서 건너온 거지요. 지금 후배들이 하고 있는 음악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봐요. 다만 한 가지, 대부분이 외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그런 음악을 하고 있어요. 우리 땅에서 태어나서 우리 된장국을 먹고 우리 정서 속에 살면서 이런 거 하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외국서 살다 와서 말도 잘 못하는 젊은이들이 이런 노래를 불러서 지금 젊은이들의 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기 그기 좀 그래요』
―그런데 그게 젊은이들한테 잘 먹히고, 또 그게 동남아와 중국에 가서 韓流 열풍도 일으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미국 거라서 그렇지요. 사실 우리 리듬이면 동남아에서 먹히기가 어렵지요』
―詩도 쓰신다면서요?
『아, 이건 詩라기보다는요, 메모 같은 겁니다. 제가 작곡을 하잖습니까? 곡에는 꼭 詩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詩는 그 속에 멜로디가 들어 있습니다. 작곡가가 곡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 詩 속에 있는 멜로디를 끄집어내는 거지요』
―어떤 때 메모를 합니까?
『저는 마음이 편하고 행복할 때는 생각이 안 나요. 몸과 마음이 힘들 때 별별 생각이 다 나지요. 행복했던 생각, 아팠던 생각…. 그러니까 전혀 생각지도 않은 글을 쓰게 됩니다. 지금도 제 차 속엔 기타가 있습니다. 또 책도 10권 이상 가지고 다니면서 봅니다.
밤에 부산서 공연이 끝나면, 그날로 밤에 자동차를 타고 올라옵니다. 공연이 끝나면 참 힘들지요. 그런데 차 타고 올라오면서 밖을 쳐다보면, 차창 밖이 그냥 詩입니다. 별도 있지요, 강이 흐르지요, 바람도 불지요, 저 산너머 추억도 있지요, 저 앞 먼 곳이 또 보이는 듯하죠…. 차창 밖에 아픈 추억도, 좋은 추억도 다 있어요. 그걸 주어 담는 거죠. 글로 막 쓰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서 그냥 기타를 치면서 그 속에 빠지는 겁니다. 그럼 한 곡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두툼하고 작은 노트를 보여줬다. 나는 그 가운데 메모된 가사 하나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기타를 가져와 쳐 가면서 최근에 작사·작곡한 「空(공)」이란 노래까지 불러줬다.
그 가사는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로 시작됐다. 그의 인생철학이 가사 속에 잘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곡은 조금 빨랐고, 창법은 나훈아 창법으로 사근사근 나가다가 꺾어져 넘어가고, 그러다가 또 힘차게 뻗어 나갔다. 히트예감이 들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하는 「사랑」이란 노랜 작사·작곡 다 한 거지요?
『그렇지요, 그건 밤 3시쯤 자다가 일어나가지고 5분 만에 만들었어요. 그냥 막 詩와 곡이 나오는 때가 있습니다』
『李美子가 있어 행복하다』
―李美子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이구, 그런 분이 우리 대한민국에 뽕짝 가수로 계시다는 걸 생각하면 참 행복하죠. 그런 분들이 안 계시면 한국의 노래가 정리되지 않습니다. 여자가 부르는 뽕짝, 그건 그냥 李美子 스타일이라야 합니다. 남자가 부르는 뽕짝, 그건 그냥 羅勳兒 닮아야 합니다, 하하…. 뒤집고, 꺾고 해 쌓고, 전부 그래 가지 않습니까?』
―그럼 나훈아 이전엔?
『제가 나오기 전엔 뒤집고 꺾고 하는 게 없었습니다. (노래 부른다)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또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 보면 시들하고…」 이렇게 얌전하게 불렀지요. 저처럼 (노래) 「가지 마아오오 가지 마아오오…」 이렇게 꺾는 기 없었어요』
―허, 노래를 들으니 그 전과 아주 달라졌군요.
『그렇죠, 저부터가 큰 전환점이 됐지요』
―그런 羅勳兒 창법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전 어릴 때부터 민요를 좋아했습니다. 어머니가 제 손을 잡고 민요하는 데 자주 데리고 가셨거든요. 그때 그런 창법이 몸에 익숙해진 겁니다. 꺾는 창법이 민요에서 나온 겁니다. 보세요. (노래) 「아아리 아아리랑 스리 스으리랑…」 이런 것들이 다 꺾기 창법 아닙니까』
―요즘 현철·태진아·송대관 이 세 사람이 라이벌도 아니면서 라이벌처럼 하면서 트로트 부흥운동을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들도 인기가 있거든요. 인기는 그냥 얻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뽕짝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앞서 가도 안 되고 한 발짝만 쓱쓱 앞서가야 합니다』
그의 뽕짝론은 계속됐다.
『뽕짝은 김치 같아요. 우린 김치 안 먹고 못 살아요. 뽕짝 없이도 못 살지요. 제가 일본 가선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뽕짝은 김치다, 일본 뽕짝은 다꾸앙(단무지)이다」 그럼 사람들이 와 웃습니다.
대중가요가 우리 서민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노래라는 것은 기후, 인간성, 지역적 조건, 음식, 이런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 뽕짝과 일본 뽕짝은 서로 닮아서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노래 속엔 일본과 다른 꼭 하나가 있습니다. 대륙 기질이 있습니다. 일본 노래엔 그게 없어요』
―羅勳兒씨 노래 가운데 어떤 게 대륙 기질인가요?
『(노래)「녹슬은 기이찻길아아아…」 하고 내뻗는데. 일본 노래엔 이런 게 없어요. 그냥 두리뭉실 넘어가지요. 일본 가수들은 한국에 와서 절대 히트 못 합니다. 간지러워요. 그 사람들의 음악의 흐름은 바다의 파도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수들은 일본에 가서 히트할 수 있군요.
『그것도 힘듭니다』
―김연자씨 있잖아요?
『김연자씨도 히트는 못 하고 있지요. 쇼 무대를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그럼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슴 아프게」는 왜 일본에서 불리느냐? 그건 여기서 히트한 게 건너간 겁니다. 일본 엔카(演歌)를 한국 가수가 불러서 히트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羅勳兒씨도 일본 가서 그런 거 시도하셨지요?
『했죠. 그러나 너무 힘들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대륙성 기질을 노래로 듣고 「와아, 잘한다!」 할 수는 있어도 가슴에 오는 건 아니거든요. 이걸 쉽게 알고 덤비면 큰 일 나죠』
마도로스 아버지 밑에서 裕福하게 자라
그는 1947년 2월11일, 아버지 崔英錫(73세시 작고)씨와 어머니 洪聖念(80) 여사와의 사이에서 2男2女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 成基씨(56)는 현재 요식업을 하고 있고 그 밑으로 여동생이 둘이 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주르르 흘러 나왔다.
『부산시 동구 초량 2동 415번지 7통 3반입니다』
부산 사람이 아니랄까 봐 몹시 겁이라도 먹은 사람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초량초등학교와 대동중학교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서 서라벌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님은 뭘 하셨습니까?
『배를 타셨습니다. 마도로스였어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무역선을 타셨습니다. 아프리카까지 다녀오시곤 했습니다. 한 번 나가시면 6개월도 걸리고 1년도 걸리고 그랬죠. 그러면서 무역도 하셨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퍽 어렵게 자랐다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 저는 아주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오신 유성기도 있었습니다. 또 그때 벌써 제 형하고 둘이 서울로 유학을 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 밥먹는 것도 힘들 때 아녔습니까?』
―그래 어려서도 가수가 될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려선 저는 클래식 가수가 될라고 했습니다. 5학년 6학년 때,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대회에서 연속으로 두 번 1등을 했습니다. 6학년 때 지정곡이 「소나무야, 소나무야…」 하는 「소나무」였고요, 자유곡은 「깊은 산 속 옹달샘…」이었지요』
―서울 유학은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형님이 서울서 학교를 다녔는데, 저도 그냥 가고 싶어서 올라왔어요. 형과 함께 장위동에서 하숙을 했습니다』
―본명(崔弘基)이 참 좋은데요. 왜 이름을 바꿨습니까?
『노래를 처음 시작하고 나서 최홍기가 그냥 보통 사람 이름 같아서 崔勳이라고 할라고 했죠. 그런데 崔씨가 영 예술하는 사람의 성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좀 기억하기 쉬운 성을 찾은 게 羅씨예요. 그담에 勳자를 붙이니까 兒자는 그냥 나오더라구요. 이름이 「훈」이라면 부를 때 「훈아」 카고 부르잖아요. 그래서 羅勳兒가 된 겁니다. 한자로 써 놓고 보니까 기가 막혀요. 어린 아이(兒)가 훈장(勳)을 받는 것 같은 이름이잖아요』
―고등학교 이름이 서라벌 예술고등학굔데 예술을 집중적으로 배우셨나요?
『연극, 음악, 미술 이런 걸 많이 가르쳤습니다』
―공부는 잘했던가요?
『못한 공부는 아니었거든요. 중학교때 선생님이 반에서 5등 안에 들어야 서울 가는 원서를 써준다고 해서, 제가 열심히 했더니 반에서 2등을 했고, 전체에서 7등을 했어요』
―서울 와서 학교 생활은 어땠어요.
『공부는 제대로 안 했습니다』
―羅勳兒씨가 소위 일류학교에 진학했더라면 지금처럼 가수가 안 됐을 것 아닌가요?
『당연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수가 됐다고 아버지께서 10년 전 73세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저를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아니 「천하의 나훈아」가 됐는데도!
『그럼요. 은퇴하고 서울에 올라와 사셨는데 그때까지도 저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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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제 하셨습니까?
『사실 전 너무 쉽게 가수가 됐습니다. 제가 가수가 되기 위해 고생한 시간이 한 시간도 안 되니까요』
―참 이상하네! 지금은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하는데!
『그때 난 클래식 성악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냈다가 아버지한테 너무 혼이 나서 내놓고 말할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저한테 판검사나 의사가 되라고 하셨죠. 그래도 제가 우리 형제들 중에선 공부를 좀 낫게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저한테 기대를 많이 한 겁니다. 그런데 제가 느닷없이 노래를 해 놓으니까 아버지가 펄쩍 뛰신 거지요』
―그래 어떻게 가수가 되셨어요?
『아버지 몰래 한 겁니다. 65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작곡가 심형섭씨가 학교 바로 옆 정릉에서 음악학원을 열고 계셨어요. (노래) 「물어물어 찾아왔소, 그 님이 계시는 곳에」(임 그리워)를 작곡하신 분입니다. 그 학원에 친구 따라 놀러 다녔는데, 거기 가서 제가 가끔 노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저한테 말은 안 하셨지만,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후에 그 분한테 들은 얘긴데, 그때 내가 노래를 너무 잘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분이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손진석 사장님하고 친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분이 손 사장님께 얘길 했대요.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이게 아주 쥑인다, 물건이 될 것 같다」 이랬다는 거요. 그러면서 「모른 척하고 한번 와서 보실랍니까?」 이래 됐나 봅니다. 말하자면 선보러 오락칸 거지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거기서 놀러 오라고 해서 갔어요. 갔더니, 그 분(심형섭)이 「노래 한번 해 볼래?」 그래요. 「어 좋지!」 뭐 뺄 것도 없어서 노래를 몇 곡 불렀어요. 그러면서 뒤를 보니까 나이 먹은 분들이 두세 분 앉아 계시더라구요.
그때 내가 당시 유행하던 「라노비아」도 불렀어요. 그랬더니 손 사장님이 내 노래를 듣고 시쳇말로 그냥 뺑 돌아버린 겁니다. 생긴 것도 시커멓고, 눈썹도 시커먼 놈이, 아, 부르는데, 그기 아닌기라!
그거야 그렇지요. 제가 그때 학교서 발성연습을 많이 했으니까. 기본이 어릴 때부터 돼 있었으니까요. 사실 지금도 두세 시간 혼자 공연해도 깨딱없는 게 그것(기본)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 손 사장님한테서 「취입 한번 안 해 보겠느냐」는 얘기가 왔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여기까지 오는 일이 너무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힘 하나 들이지도 않고,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거기까지 간 겁니다.
그때만 해도 LP 속에 한 곡 취입해서 판을 내는 데 6만원을 내야 했습니다. 그때 국민주택이 20만원 할 때니까 얼마나 큰돈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나한테는 돈이고 뭐고 밥 사줘 가면서 공짜로 내주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거저 취입을 했습니까?
『그렇지요. 「취입하자」 해서 「그래 뭐 해 보지!」 한 겁니다. 김영광씨가 작곡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 또 「천리길」 이런 곡을 포함해서 네 곡을 받았는데 연습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마장동이란 녹음실에서 녹음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기계에 두 채널밖에 없어서 노래 한 곡에 한 군데만 틀려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어요. 그래서 네 곡을 취입하자면 꼬박 하루가 걸리는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 저는 네 곡을, 연습 한 번 하고 취입하고, 연습 한 번 하고 취입하고…, 이렇게 한 번도 안 틀리고 6분씩 네 곡을 했으니까, 4×6=24에 앞뒤에 몇 분 더해서 딱 30분 만에 끝내고 나와 버렸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이 잘했다고 자장면하고 탕수육을 사줘서, 그걸 실컷 먹었어요』
뭉테기 돈에 퍼블릭 카에
―계약서는 썼던가요?
『계약서고 나발이고 없었지요. 내가 돈을 줘야 하는지, 내가 돈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레코드를 낸 겁니다』
―그담부터 계산이 복잡했겠네. 이거 큰일 났네!
『큰일 났지요. 그담부터는 회사에 가면 그냥 뭉테기 돈을 주는 겁니다. 심심해서 회사에 들리면 손 사장님이 50만원도 주고 100만원도 주고…, 그러더니 퍼블릭 카라는 것도 한 대 사주더라구요』
―학교는?
『3학년이 됐는데, 학교도 제대로 안 가는 겁니다. 이거(노래)에 바빠져 버렸으니까』
―레코드 내고 나서 방송사에 잘 봐달라고 외교도 하고 그래야 할 텐데, 그런 것도 했나요?
『그런데, 이기 거꾸로 된기라. 라디오에서 먼저 나와달라꼬 난린기라! 내가 그런데 다니기도 전에 라디오에서 펑펑 쏟아져 나와 버렸어!』
―또 큰일 났네! 부모님한테 들켰군!
『그런데도요, 우리 할머니하고 우리 어머니는 그게 난 줄 몰라! 왜냐하면 이름이 나훈아니까! 아버지는 외국에 가 계시고』
―처음 히트한 게 무슨 노래였지요?
『「천리길」이었어요. 오아시스에서 여러 사람이 내는 LP에 내 노래 「천리길」 한 곡을 끼워 넣어 먼저 낸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약속」을 차례로 낸 겁니다 한 곡에 6만원씩 돈을 내고 여럿이 판 한 장을 내는 데에, 돈 안 내고 무임승차한 내 노래를 하나씩을 끼워 넣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던 거죠』
羅勳兒의 데뷔로, 고등학생 崔弘基가 살판났을 뿐만 아니라, 오아시스도 살판이 났다.
『그때 사실은 오아시스가 빚에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노래가 히트하니까 빚을 다 갚고 벌떡 일어서게 돼버린 겁니다』
그런데 好事多魔(호사다마)라고 문제가 생겼다.
『「천리길」이 전국의 라디오에서 모두 1위곡으로 올라갔을 때 금지곡이 돼버렸어요. (노래) 「돌부리 가시밭길 산을 넘어 천리 길」 하는 노랜데, 이게 배호의 「황금의 눈」, (노래) 「사랑을 아시나요, 모르시나요」와 멜로디가 똑같다고 해서 금지곡이 됐습니다. 배호씨가 저보다 1∼2년 선밴데, 한참 날릴 때였죠』
『가수 안 됐으면 감방에 있을걸』
그러나 금지곡 결정도 羅勳兒의 수직 상승을 막지는 못했다.
『금지곡이 되니까 방송에 못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손 사장님이 바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낸 겁니다. 그랬더니 이게 또 굉장한 히트를 한 겁니다. 그러고 나서 「물어 물어 찾아 왔소」(임 그리워)가 또 터졌지요! 「가지마오」가 터졌지요! 계속 터지니까 사장님이 돈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 됐어요』
―그러면 羅勳兒씨도 돈을 주체하지 못했겠네!
『돈이 얼맨지도 모르고 자꾸 받았는데, 친구들하고 다 써버렸지!』
―저런!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뜨니까 오아시스 사장이 아버지한테 인사를 가자캐요. 내가 얘길 안 했더니 우리 집이 못사는 줄 알았는지 쌀 한 가마를 지프에 싣고 돈 50만원을 봉투에 넣어 갖고 부산으로 내려간 깁니다』
―羅勳兒씨도 이제 이만하면 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겠죠.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 집에서 그만 난리가 난 깁니다』
―왜요?
『그때 우리가, 아버지가 외국에서 들어오신 줄 알고 갔어요. 그때가 여름입니다. 아버지가 하얀 모시옷을 입고 계셨어요. 들어가자마자 손 사장님하고 큰절을 했어요. 「왜 왔냐?」 그러셔서 손 사장님이 「사실은 (아드님이) 가수가 돼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서 50만원이 든 봉투를 드렸어요. 쌀은 운전기사가 밖에서 내려놨고. 그걸 보고 아버지가 「돈 집어넣어라, 쌀도 도로 가져가라」 하시면서 난리를 쳐서 손 사장님이 그냥 다 가지고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 길로 병원으로 가고』
―아니 어디 맞았습니까?
『혈색이 안 좋다고 해서 아버지 친구분이 경영하는 병원에 저를 집어넣었는데, 사실은 서울 가서 그 짓 못 하게 하느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입원하길 참 잘했어요. 가서 보니 폐가 안 좋았어요. 그래서 그때 치료를 받아서 다 나았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저를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얼마나 고집이 세셨던지…』
―지금도 가슴에 맺혔겠군요.
『그럼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1년에 몇 번씩 경기도 이천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푹 울고 옵니다』
―아버지 말씀 안 들은 게 후회됩니까?
『안타깝죠. 지금도 공부를 더 했더라면, 하는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그때 羅勳兒씨가 가수가 돼서, 그야말로 前途(전도)가 洋洋(양양)하게 잘 나갔지만, 만약 가수가 안 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죄송합니다. 틀림없이 깡패가 돼서 감방에 드가(들어가) 앉아 있을 깁니다. 제 친구들도 그런 얘기를 해요. 건달들 마지막 가는 곳이 거기 아입니까? 틀림없을 깁니다』
―그런 소질은 좀 있으셨던가요?
『제가 경찰서에 폭력으로만 일곱 번 드갔다 나왔으니까요. 상대가 전부 깡패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나온 깁니다. 일반 시민을 때렸다든가, 내보다 약한 사람을 때렸다면 그냥은 못 나왔겠지요』
―그래 그런 사람들하고 싸워서 이깁니까?
『제가 상당히 빠릅니다. 그리고 좀 셉니다』
시민회관서 공연중 怪漢과 격투
―인기인이 웬만하면 참아야지 왜 싸웁니까?
『연예인들한테는 건달들이 달라붙습니다. 내가 공연하는데 건달이 와서 괜히 객석에 앉아 있는 여자들 젖가슴을 만지면서 상소리를 합니다. 그러면 객석에서 「와, 와!」 해쌓고 난리가 푸썩 납니다. 그럼 공연이 되겠습니까? 그때 참아야 하는데, 저는 그걸 못 참고 「야, 니 이리 와!」 해서 불러다 놓고 한 방 멕이는 겁니다』
―왼쪽 뺨 위에 있는 그 상처(5cm쯤)가 공연하다 사이다 병에 찍혀서 다친 거라죠?
『그때가 72년 6월이었어요.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하는데, 누가(金OO·당시 29세) 올라와요. 전 누가 악수하러 올라온 줄 알았습니다. 멋도 모르고 손을 내미는데 그냥 사이다 병 깨진 게 들어오는 겁니다. 그 사람은 노래를 못하게 제 목을 찌를라구 했대요. 그때 목을 찔렸으면 죽었지요. 얼른 피해서 뺨 위에 찍힌 겁니다. 그런데도 계속 사이다 병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 무대에서 8분을 싸웠습니다』
―그 난리가 났는데 사람들이 구경만 하고 있었나요?
『밑에서는 이걸 쇼로 알고 구경을 한 겁니다. 그땐 「다치마와리」(난투)라고 무대에서 싸우는 연기를 하고 그랬거든요. 박노식씨 같은 분이 그런 연기를 잘했죠. 이게 그런 건 줄 알았던 겁니다. 臨席 경찰도 그런 걸로 알고 보고만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치고 받고 하다가 보니까 위치가 바뀌어서 내가 피 흘리는 게 보였고, 또 피가 객석으로 팍팍 튀니까 관객들이 막 울고 난리가 났죠. 그러자 내가 그 사람 무릎을 꿇렸고, 경찰이 올라왔죠. 그래서 그 사람을 잡았죠』
―그때 南珍씨가 시킨 거다, 아니다 해서 말썽이 많았는데….
『남진씨가 시킨 건 아니었어요. 후에 남진씨가 얘기를 했는데, 그 사람이 좀 모자란 사람이었는데 자기를 찾아와서 「나훈아를 죽이겠다」며 횡설수설 하면서 귀찮게 하더래요. 그래서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데리고 나가 보내면서 5만원을 줬대요. 그러니까 이 모자란 사람이 「아, 이거 죽이라는 거구나」 하고 생각한 것 같아요』
―남진씨와 라이벌로 한국 가요계를 양분하다시피한 기간이 있었지요.
『그때가 참 황금시대였지요. 대한민국의 가요역사상 그런 때가 다시 오기가 어려울 겁니다. 경쟁도 했지만 相扶相助(상부상조)하기도 했지요. 인기를 얻는 데 서로 도움이 됐어요.
모든 면에서 그렇게 라이벌이 될 만한 상대를 서로 만나기가 힘들었죠. 고향도 호남(남진) 대 영남(나훈아)이었고, 생긴 것도 한쪽(남진)은 아주 잘생겼고 이쪽(나훈아)은 소도둑 같고, 노래하는 스타일도 저쪽은 엘비스 프레스리처럼 막 춤추면서 하고. 이쪽은 거의 서서 하고…. 그 당시에 또 金泳三씨와 金大中씨가 영·호남으로 서로 라이벌이고. 그래서 정치는 누구와 누구, 노래는 누구와 누구, 이랬죠』
『나를 부르려면 1억을 내야 한다』
―개인적으로 南珍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만한 가수가 만들어지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노래 잘하면 얼굴이 좀 그렇거나 키가 작거나 그렇죠. 다 갖추기가 참 어렵죠. 그런데 남진씨는 다 갖췄어요. 거기에다가 저보다 훨씬 더 연예인에 맞는 성격까지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南珍씨는 왜 조용할까요?
『아마 관리 때문이겠지요』
―관리는 어떻게 하는 게 잘 하는 겁니까?
『별(스타)은 별이어야 합니다. 별은 구름이 조금만 끼어도 안 보여야 합니다.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별은 별이 아닙니다. 별은 하늘에서 반짝반짝 스스로 빛나야 합니다. 빛날려면 항상 닦아야 합니다.
내가 저 동네 아저씨 같다면 사람들이 돈 주고 시간 버려 가면서 왜 보러 옵니까. 공짜표 줘도 안 올 겁니다. 참 TV에도 잘 안 보이고, 볼락캐도 방법이 없고, 보고는 싶은데…, 이럴 때 사람들이 보러 오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스탑니다. 우리는 꿈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무절제하게 오라는 대로 다 가면 안 되겠군요.
『그렇죠! 내가 가야 할 자리를 골라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누가 말해도 설 자리가 아니면 절대 안 섭니다』
―그러면 너무 비싸게 군다고 안 할까요?
『욕을 먹어야지요. 미국서 제가 신문을 보니까, 일반대중 가운데 30%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슈퍼스타가 된답니다. 너나 나나 다 좋아하는 사람은 슈퍼스타가 아니라 그냥 스타라는 겁니다. 싫어하는 사람 30%가 있어야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겁니다. 저는 욕을 많이 먹습니다. 방송사에서 제일 많이 욕먹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출연 교섭 한번 할래도 「더러워서 죽겠다」고 그래요.
우리 가수 가운데 학벌 좋고 공부 잘하고 노래 잘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분이 쇼하면 손님 안 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아주 점잖고, 교양 있는 말만 하고, 그러니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교수 같잖아요. 그러니까 안 가는 겁니다.
뭔지 모르지만 스캔들도 있고, 뭔가 좀 삐딱하게 굴기도 하고, 뭐 하나 할락카면 정신없이 난릴 직여 뿔고, 그러니까, 도대체 저게 뭐야, 한번 가보자, 이런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혹시 돈 많이 안 줘서 안 온다는 소리는 안 듣습니까?
『돈 많이 안 주면 안 갑니다. 그기 당연한 거 아니에요. 누가 대한민국에서 젤 비싸냐? 제가 젤 비쌉니다. 제가 2등의 열 곱은 더 받습니다』
―방송사에 모시려면 한 1억은 내야 합니까?
『방송사에선 가수들한테 출연료를 10만∼20만원밖에 안 줍니다. 그건 뭐냐? 내가 출연시켜 주니까 너희들 홍보가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는 안 합니다. 저를 출연시킬려면 적어도 2천만원 이상을 내야 돼요. 큰 프로그램에 나갈 때는 물론 1억이 넘어야지요』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인터뷰도 돈으로 따지면 수천만원 나가겠는데요.
『예, 인터뷰도 그렇습니다. 저와 인터뷰하기가 쉬운지 한번 물어 보십시오. 보세요, 이렇게 어려우니까 月刊朝鮮에서 吳 선생님 같은 분이 오신 겁니다. 그건 제가 만들어야 합니다.
제 공연을 보고 나서도 사람들이 만족을 하고, 밖에 나가서 자랑을 하게 해야 합니다. 관객들은 최고로 비싼 (보통 15만원) 입장료를 내고 왔지만, 내가 또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주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내가 최고의 입장료를 내고 최고의 무대를 보고 왔다고 자랑을 하게 되는 겁니다. 가수는 이렇게 자랑거리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96년에 있었던 「KBS 설날 특집 나훈아 빅쇼」에선 다이아몬드 550개가 박힌 10억짜리 의상을 입고 등장하셨는데, 너무 호화롭지 않았나요?
『이건 꿈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짓을 해야 합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자랑을 해야 합니다. 「야, 나훈아가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나왔어. 너 그거 봤냐? 야, 대단하더라!」 이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번 돈 모두 사회에 내놓겠다』
―디너 쇼 한 번 하면 1억이 들어온다면서요?
『아니, 그거 들어와선 안 되죠』
―어, 그럼 2∼3억 들어오나요?
『하하하, 그게 정해져 있는 건 아니죠』
―그러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羅勳兒씨가 최종적으로 하려고 하는 건 뭡니까?
『제가 얘기를 해드릴 테니 더 이상은 묻지 마십시오. 제 큰애(최유민, 고3)가 곧 대학에 들어가는데요, 내가 그랬어요. 「공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시켜주마. 공부가 끝난 다음에는 너한테는 1원도 못 준다. 왜냐? 이건 내 돈이다. 내 돈은 무슨 돈이냐? 사회에서 날 사랑해 준 사람들이 있기에 내가 번 돈이다. 이걸 전부 사회에 주고 죽을 거다」 그랬어요.
더 묻지는 마십시오. 지금도 사회에 고맙다는 생각으로 내가 할 일을 생각하고 있고 또 실제로 하고 있습니다. 더 묻진 마십시오. 이건 아무도 모르니까요』
羅勳兒 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허연 턱수염,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 짙은 눈썹.
―흰 수염도 기르고, 희끗희끗하게 센 앞머리를 꼭 염색한 것처럼 헤어스타일을 꾸미셨는데, 이게 다 패션인가요?
『스타로서 컨셉의 하납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에 또 다른 모습으로 확 바꿉니다. 이게 우리가 늘 연구하고 노력해야 할 과젭니다. 보세요, 한 자리에 35년간 앉혀 놓고 차 한 가지만 먹어라 먹어라 하면 진저리가 날 거 아닙니까?』
―알았습니다. 나도 내일 머리를 삭 밀어버려야겠습니다. 그런데 아까 스캔들 말씀을 하셨는데, 金芝美씨하고 73년(나훈아씨가 26세 때)부터 81년(34세)까지 8년간 함께 계셨는데….
이 말이 나오자 그는 얼굴빛이 난처해지면서 『아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대답하기 곤란한 대목을 만난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뒤 차분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그때 그 여인하고 만나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羅勳兒가 金芝美 덕이다?
『아니 「덕」 하고는 의미가 좀 다르지요. 그때 참 저는 같이 있으면서 느끼는 게 참 많았습니다』
―어떤 걸?
『아, 내가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
―왜?
『저보다는 (金芝美씨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일곱 살 年上) 첫째 아는 게 많았죠. 그래서 내가 더 많이 알고 인격적으로 나아져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요. 또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세월이 어떤 세월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세월이었어요. 내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 부분이 아주 별다른 세계 같아요. 좋고 나쁘고는 따질 수 없지만…』
『金芝美는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女人』
―어떤 의미에서?
『어쩌면 그 세월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뻥 뚫린 세월이 아니었나 생각돼요』
―그 기간엔 노래도 안 했잖아요?
『정말로 중요한 건, 난 노래 부르는 걸 싫어한다는 겁니다. 노래하기 싫었어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해가 안 갈지 모르지만, 만약 제가 다시 태어난다면 저는 노래는 죽어도 안 부를랍니다』
―노래가 고맙잖아요. 羅勳兒를 우뚝 세워 놓고 5천만, 7천만 겨레가 다 사랑하고….
『그걸 내가 만족해야 하는데, 저는 이 직업이 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 속에서 빠져나와서 저를 볼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 제가 인기 속에 빠져 있으면요, 제 관리가 안 됩니다. 노래가 좋아서, 환장해서 노래를 하면, 그 속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때 노래가 싫어서 그만뒀나요?
『그때 당시는 「아아, 인제 노래는 싫어!」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럼 뭐하고 살려고 했습니까?
『나는 비즈니스가 좋았어요. 대전에서 「草原」이란 식당을 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작업복 입고 뚝딱거리고 그랬어요. 난 그런 게 좋았어요. 내 스타일이 그래요』
―거기서 배운 건?
『비즈니스 마인드를 배웠죠. 저는 지금도 노래를 하고 있지만 유별나게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분이 합치기 전까지, 물론 그 사이에 군대(공군)도 갔다 왔지만, 7년 가량 羅勳兒씨가 노래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 그 돈 어떻게 했습니까.
『다 가지고 가서 함께 합쳤지요』
―우리는 그때 떠꺼머리 총각이 봉잡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전혀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혹시 노망이 들어서 자서전을 쓴다면 이 얘기를 자세히 쓸 수가 있을 겁니다』
―지금 자서전을 한번 써 보시지.
『거짓말 안 할 자신이 없어서 못 씁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참말을 해도 사람들이 「그래, 노망들렸으니까 한번 봐주지」 이럴 때 써도 쓰겠다는 겁니다』
―그럼 이제 이런 생활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8년 동안 거의 매일 우리 집 앞에 기자들이 망원렌즈를 들이대고 땡겨놓고 있었습니다. 둘이 도마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는 것 자체가 옷을 잘못 입은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처음 2∼3년은 맞지 않는 옷도 불편을 못 느꼈습니다만, 사는 동안 결점도 보이고 그러니까 좋았던 것이 좋지 않은 것으로 바뀌기도 했고요.
이래저래 참 피곤했습니다. 다 지난 일인데도 노상 찍고 신문에 나고 그러니깐 아주 불편했습니다.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세월과 함께 쌓여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여인은 내 인생에 참 필요했던 여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때까지 平坦大路를 걸어오던 내가 덜커덩 그 일이 있고부터 이것저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또 모든 것이 힘들게 됐죠. 그런 걸 겪으면서 제가 어른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겁니다』
40세에 道德經 읽고 크게 깨달아
어른 얘기는 좀더 계속된다.
『마흔 살이 됐을 때였지요. 그 전까지 저는 스스로 참 똑똑한 줄 알았어요. 마흔 살이 되면서 어떤 책을 보다가 그냥 뒤통수를 뚜디려 맞았어요』
―그게 무슨 책입니까?
그는 대답 대신 책상에 가서 「도덕경」을 가지고 왔다.
―어느 부분이 그렇게 충격적이던가요.
『전체가 그랬어요. 무슨 지침으로 삼기엔 좀 복잡했지만 내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엄습해 왔어요.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 뒤에 서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 서지 않고 한 발짝만 뒤로 서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언제부터 다시 노래를 시작했던가요?
『80년부터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金芝美씨와 73년부터 만나기 시작해서 81년에 헤어졌는데, 75년부터 노래를 안 부르다가 80년에 다시 시작한 거죠. 5년간 안 부른 셈이죠』
―참 어려웠겠네요.
『어려웠죠. 그러나 화려했죠. 내가 노래는 안 했지만 매일 주간지에 나서 나에 대한 관심은 많았기 때문에 내 노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았지요』
―그때 KBS에서 화려한 컴백 쇼를 했지요?
『그렇지요. 참 화려하게 했는데, 바로 방송출연 금지 처분을 받았어요』
―왜요?
『「울긴 왜 울어」를 불렀는데 저속하다고. 웃어도 시원찮은데 왜 우느냐, 이거죠. 그때가 80년대 초의 상황이니까. 다른 방송사에선 괜찮았는데 KBS만 방송금지 결정을 내렸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되니까 다른 방송사에서도 조심하게 돼서 제가 방송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헤어질 때 돈이 한푼도 없이 나왔을 거 아닙니까?
『한푼이 아니라 숫가락 젓가락 하나도 없이 나왔습니다. 있는 돈 다 주고 나왔죠. 그러고도 더 주고 나왔어요. 그게 남자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무슨 얘기죠?
『그때 서울 청량리 맘모스 카바레에서 한 달에 1억원씩 받기로 하고 한 달치를 먼저 받아서, 3분의 2는 金芝美씨한테 주고 3분의 1로는 전세로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를 얻었습니다』
―방송은 못 하고 맘모스에서 노랠 하셨겠군요.
『그럼요. 거기서도 히트를 쳐서 맘모스가 돈을 무지하게 벌었습니다. 저녁마다 사람들이 몰려 왔으니까요. 거기서 하루 한 시간 이상 공연을 했습니다』
취입 2500, 작사·작곡 800, 히트 53曲
―헤어지고 나오니까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는 내 꼴도 보기 싫어 하시고, 어머니는 왔다갔다 하시면서 밥도 해주고 하셨는데, 어머니는 가슴 아픈 자식한테 뭐라고 얘기하기 힘드니까 「밥이나 제대로 묵어야지, 이놈아!」 이러셨죠』
―再起하면서 새 곡을 만들어 히트했죠?
『일단 再데뷰하면서 내놓은 「울긴 왜 울어」가 히트를 했구요, 다음에 「사랑」, 「잡초」, 「18세 순이」, 「영영」, 「갈무리」, 「무시로」 이런 곡들이 연달아 히트했습니다』
―히트곡은 몇 곡이나 됩니까?
『제가 정확하게 따져 보니까 53곡입디다. 취입은 2500여 곡 했고, 작사·작곡한 것이 800여 곡 됩니다』
음반 낸 양을 앨범으로 따지면 200장이 넘고 판매량은 2000만 장이 넘는다고 한다.
―작곡이 참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가사 만들기가 어려워요. 가사만 만들면 그 속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니까요. 그리고 본능적인 감각이 있어야 해요. 억지로 만들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연예인들 중에 사업하다 실패한 분들이 적지 않던데.
『연예인들이 사업하다 실패하는 첫 번째 이유은 귀가 엷다는 겁니다. 남이 무슨 얘기 하면 「와, 맞아!」 하고 금방 그쪽으로 쏠립니다. 두 번째는 公과 私를 못 가립니다. 자기 기분대로 어린애처럼 할려고 합니다. 셋째로 연예인들이 절제된 생활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제대로 안됩니다. 우리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해뜨기 전에 생각해 놨다가 해뜨면 그대로 막 뛰어야 합니다. 뛰어야 할 시간에 자리에 누워 있으면 됩니까?』
그가 자신의 기획사 我羅企劃을 현재의 위치인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그의 건물에 세운 것은 86년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레코드 제작 판매업을 시작한 것은 89년 봄부터였다. 我羅企劃이란 이름 역시 그가 작명한 것이었다. 첫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 「사나이 눈물」. 이후 그는 과거에 그가 불렀던 노래도 편곡해서 새로 만들었고, 다른 가수가 부른 흘러간 가요도 새로 취입해 내놓았다. 후배 가수 주현미와 함께 메들리 카세트 테이프를 내놓아서 메들리 시장을 석권하기도 했다.
그가 내놓는 음반마다 잘 팔려 나가 이젠 「아라기획」 하면 도매상들이 선호하는 회사가 됐다고 한다.
韓·美·日에 알찬 회사, 재산 數百億
―이 회사가 업계에서 어떤 위칩니가?
『우리 회사는 구멍가겝니다. 그래도 아주 단단한 회삽니다. 지난번 IMF 때도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어요. 회사가 일을 크게 벌여 놓고 있으면 위기가 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죠.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압축시켜 놨지요』
―직원은?
『다섯 명밖에 안 돼요. 우리가 하는 일을 다른 회사처럼 할려면 100여명 있어야 돼요. 우리가 레코드 회사를 제대로 할려면 CD와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공장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만 80∼90명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다 관리직 판매직 합치면 100여 명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음반 만드는 일을 오아시스 레코드, 아세아 레코드 이런 곳에 賃加工(임가공)으로 시키거든요.
제일 조심할 게 사람 쓰는 겁니다. 사람 많이 쓰는 건 비즈니스로는 제롭니다. 위기가 오면 큰일 납니다. 또 퍼뜩하면 「나훈아 회장 나와라!」 하고 난리를 직이면 얼마나 골치가 아픕니까.
임가공 맡기기 전에 우리가 기본적인 제작을 하는데, 이때엔 사람이 많이 필요 없거든요. 녹음실도 빌려서 하고요. 이렇게 제작한 걸 레코드 회사에 갖다 주면서 CD를 만들어 달라고 하죠. 그러면서 한 장에 얼마씩을 쳐서 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예를 들면, 한 달에 1억원벌 것을 임가공 회사에 주는 것 때문에 7천만원밖에 못 벌어요. 그러나 3천만원을 쓰는 대가로 우리는 IMF도 걱정 없고, 「나훈아, 나와라」 하는 일도 없는 거죠』
―여기서는 羅勳兒 노래만 냅니까?
『그렇지요. 제 음반만 내는 데도, 저희는 큰 레코드 회사가 가지고 있는 시장보다 더 큰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국에 도매상 32군데를 가지고 있습니다. 큰 회사는 오히려 28군데밖에 안 돼요』
―羅勳兒씨의 수입 가운데, 노래 불러서 들어오는 돈 하고 레코드 사업해서 들어오는 돈 하고 비율이 어떻습니까?
『비슷할 겁니다』
―와아!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미국에도 사업체가 있지요?
『미국 하와이에 무역 회사가 하나 있습니다. 음악과 전연 관계가 없는 회삽니다』
―일본에는?
『일본에는 아라기획과 똑같은 「서울뮤직」이란 회사가 있습니다. 거기도 현지 직원이 네 명 있는데 제 노래를 일본어 음반으로 내서 유통하는 회삽니다』
羅勳兒는 일본에도 진출해서 크게 활약했다. 그가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85년이었다. 그후 94년 그는 일본인이 작사·작곡한 엔카 음반 「忘却雨(망각우)」를 내면서 일본 가요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일본 노래와 그의 국내 히트곡(번역곡) 음반을 여러 장 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처럼 히트했습니까?
『히트 못 했습니다. 그래도 손해보는 건 아닙니다. 거기선 제가 방송도 안 하고 콘서트도 안 하니까 히트하기가 어렵죠』
그의 재산은 정확하게 얼마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만, 주위에선 어림잡아도 수백억원은 넘을 것이라고 한다.
羅勳兒의 담배 끊는 법
그는 金芝美씨와 헤어진 지 2년 후인 83년 후배가수 丁水卿씨(본명 정해인)와 결혼해서 다시 가정을 꾸렸다.
―부인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집사람이) 원래 노래를 할려고 했어요. 일본에 15세 때 가서 아이돌 가수가 됐는데 1년쯤 하다가 한국에서 공연을 한번 하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일본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러다가 그렇게 됐죠. 그때, 내가 뭔가 빨리 정리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지금 가정적으로 퍽 안정된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제가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 합니다. 그래도 큰놈이 「저는 이 세상에서 아빠를 가장 존경한다」고 합니다. 학교(하와이 소재)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서 써오라」는 숙제를 낸 모양입니다. 후에 학교에 한번 갔더니 선생님이 「얘 혼자만 아빠를 제일 존경한다고 써왔다」고 그래요. 그래서 한번 보고 싶었다는 겁니다』
―담배를 많이 피우셨다던데.
『하루에 네 갑이오. 그렇게 많이 피우던 담배를 안 피운 지 2년8개월째 됩니다. 사람들이 담배를 못 끊는 이유가, 최면에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담배가 아주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 끊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내년 1월1일부터 끊겠다」고 정하고, 「내가 담배 끊었으니, 나한테 담배 권하지 말라」고 선언을 하고 그러죠.
담배 끊을라면 담배를 아주 낮춰보고 비웃어야 됩니다. 담배를 가볍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부터 끊겠다고 정하지 않고, 어느 날 점심 때 점심 먹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자 이제부턴 담배 안 피워야지」 이러고 다신 안 피운 겁니다. 지금도 저는 「안 피운다」고 그러지 「끊었다」고 안 하지요. 누가 물으면 「앞으로 5년 뒤에 피울 거야」 그럽니다
담배를 끊으면 금단현상이 오지요? 그건 「이제 내가 담배를 끊었으니까 절대로 못 피운다」 할 때 오거든요. 그러나 저는 안 피우니까 또 피울 수 있죠. 그러니까 금단현상도 안 오죠. 이게 내 마인드 컨트롤이에요』
―어디서 들으니까 小食이 건강비결이라고 돼 있던데,
『저는 간이 남보다 훨씬 크고 위장이 남보다 작아요』
―아니, 간이 크다니!
『의사인 친구가 간을 보는 새 기계가 들어왔다고 한번 오라고 해서 가 봤죠. 제 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른 사람 간보다 배는 더 커요. 난 「간 크다」는 말만 들었지, 내 간이 그렇게 클 줄은 몰랐어요.
그 대신에 위가 작아요. 그래서 많이 먹고 싶어도 사실은 많이 못 먹어요. 小食을 하는 게 아니라』
―술은?
『요즘 좀 마십니다. 한 15년간 끊었다가 요즘 다시 마시기 시작했어요』
―대전에 (金芝美씨와) 있을 때 글씨 공부를 하셨다구요?
『사실은 그 전부터 배울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제가 氣가 짧아요. 그때까지 제가 책을 못 읽었어요. 갑갑해서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게 글씹니다. 먹을 갈라면 적어도 30분간은 가만히 앉아서 갈아야 합니다. 처음엔 이 먹을 가는 데 한 열댓 번은 일어났다 앉았다 했습니다』
―학원에 가서 배웠나요?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글씨도 쓰고 동양화도 좀 하고 그랬습니다』
―서양화는 어떻게 해서 하게 됐습니까?
『김수정(女)이란 서양화가가 있는데 그 집과 교유가 있어서 왔다갔다 했어요. 그 집에 가서 그 화가가 그리는 걸 보니까 한번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도를 좀 받아서 시작했지요』
―그것도 氣를 다스리기 위해서?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는 혼자 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실 줄 모르지만 저는 돈을 받고 제 얼굴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래서 휘젓고다니는 것보다는 혼자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혼자 있을 때는 무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연예인들 가운덴 그런 때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그래서 短命하게 간 분들이 있잖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해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의 건물 2층 사무실 입구에는 꼭 고흐의 자화상 같은, 초록 바탕에 그린 그의 자화상(유화)이 걸려 있다. 같은 사무실 벽면에는 「여인의 눈물」과 「성령의 이미지Ⅱ」란 제목이 붙은 30호쯤 되는 유화 두 점이 걸려 있었다. 두 점 다 그의 작품으로, 1999년과 2000년에 한국미술인 선교회의 공모전에서 입선한 것들이다. 수준급 이상으로 보였다.
―國展에 입선한 적도 있습니까.
『사실은 지금 출품할라고 서양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서양화를 기리기(그리기) 시작한 지 6년이 됐습니다. 나 혼자 기리니까 잘 기리는 지 못 기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재작년(99년)에 미술인 선교회에서 공모전을 하길래 살짝 「최홍기」라고 이름을 써서 두 점을 갖다 낸 겁니다. 심판을 받고 싶어서 보냈는데, 어, 생각지도 않게 입선을 한 겁니다. 그래서 작년에 또 냈더니 또 입선이 된 겁니다! 그래서 조금 힘이 나서 지금 國展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政治보다 노래를 잘한다』
―그런데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주일씨가 국회의원 나갈 때, 사실은 당시 여당에서 프로포즈를 받았습니다. 그때가 1월이었는데 애들하고 스키장에 가 있었습니다. 아무 연락도 하지 말라고 하고 가 있었는데 우리 회사 尹 사장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좀 높은 데서 연락이 왔다는 겁니다.
「높은 데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끊어!」 그러고 열흘 후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들어보니 국회의원 하라는 겁니다. 그때 여당 당직자가 저녁약속을 하자고 해서 내가 전화로 「저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했더니 그쪽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정치를 좀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래요. 그 말 듣고 제가 당장 이랬어요. 「여보시오, 내가 정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 나는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울긴 왜 울어>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 부른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이클 잭슨이 저보다 <울긴 왜 울어>를 더 잘 부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죠, 그거야 羅선생이 최고로 잘 부르죠」 「그러면 내가 뭘 해야 합니까? 정치를 해야 합니까? 노래를 해야 합니까?」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참 미워요.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뭘 하면 나라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 않고, 「아, 저놈 인기 있으니 내보내면 당선되겠다. 그럼 우리 당이 한 석 더 차지한다」 이런 생각만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국회가 왜 저 모양입니까? 돈 좀 있으면 국회의원 할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 안에 국회의원 자격이 있어서 앉아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국회의원은 정말 엘리트가 해야 합니다. 잘 배우고, 사고가 똑바르고, 정말 국민들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앞으로 비례 대표제로 금배지를 달아준다면 슬그머니 받으시지.
『그러면 안 돼요! 저는 늙어서 바보가 돼도 여기 앉아 있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 후배들이 안심하고 노래 불러요! 』
―대한민국은 앞으로 잘 될 것 같아요?
『안 돼요! 교육이 이래 가지고는 앞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을 바꾸는 데에 돈을 많이 쓰겠습니다」 하는 후보가 나온다면 대통령으로 뽑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의 부인과 두 자녀는 미국 하와이에 가 있다. 아들 둘이 그곳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부인이 왔다갔다 하면서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 한다.
『노래 접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자녀들이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나요?
『혹시 다른 눈으로 보실까 봐 걱정입니다. 전에 우리 큰애가 한남동에 있는 아주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유치원에서 바자회를 하는데 한 아이 앞에 500만원씩을 부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애 엄마한테 그랬습니다. 「당장 그만둬!」 그러고 나서 유치원에서 어쩌면 이런 발상이 나올 수 있는지 여기저기 물어봤더니, 정말 이건 교육이, 교육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보내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사립학교는 특수층만 다니니 애들이 고생을 모르고 자라게 되고, 공립학교에 보내자니 썩은 데가 많고…. 그래서 초등학교를 SIS(Seoul International School)에 보냈어요. 얘(유민)가 나를 안 닮았는지 공부를 잘해요. 전교에서 1등을 해요.
하와이에 全미국에서 10大 명문에 들어가는 유명한 학교(초등·중등·고등)가 있는데 하버드 대학을 1년에 12명씩이나 보내는 곳입니다. 그 학교(중학 과정)에 유민이를 시험삼아 응시하게 했더니 수석으로 합격했어요. 외국인으로 수석을 한 게 처음이랍니다. 그래서 「에이, 니 공부 한번 해 봐라!」 하고 보낸 겁니다. 이왕에 세계를 무대로 살아볼라면 「니 미리 한번 본바닥에 가서 동창(친구)을 많이 만들어라」 이거지요.
왜 하와이를 택했느냐? 全미국에서 노란 사람이 큰소리 치고 사는 데가 바로 하와입니다. 얘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교 부회장을 했으니까요. 동양 애가 큰소리 치는 데가 거기 말고 어디 있겠어요. 대학교 때 가면 좀 다르겠지만, 그땐 본인이 인종의 벽에서 오는 어려움을 받아넘길 힘이 생길 테니까 그땐 문제가 없겠지요』
현재 큰아들 유민은 고등학교 3학년에, 둘째 아들 유빈은 같은 학교 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다.
―골프 잘 치세요?
『잘 치진 못하지만 핸디가 8∼9 정돕니다』
―어? 자주 나가세요?
『몇 달에 한 번 나갑니다』
―다른 운동은?
『근처 체육관에 가서 날마다 두 시간쯤 유산소 운동을 하고 사우나를 합니다』
―羅勳兒씨를 「트로트의 황제」라고 하던데.
『그렇게 하지 말라니까요. 보통 나훈아도 어려운데 황제는 무슨 황젭니까!』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뭡니까?
『조용히 노래를 접는 일입니다』
―접다니?
『노래를 접고, 편하게 살면서 책도 좀 읽고, 그림도 좀 그리고, 그러면서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왜 벌써 그만둘 생각을 합니까?
『그 동안에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지요. 말하자면 최고로 비싸게 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게 통했는데, 내가 「내 노래 들을라면 얼마 내!」 했을 때, 그걸 받아 주면 되지만 만약에 「그래? 그럼 그만둬!」 하면 나는 뭐가 됩니까? 그런 날이 기어코 옵니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그만둬야지요』●
羅勳兒씨(본명 崔弘基·54)의 별명이 「트로트의 황제」라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어와서, 내 생각엔 그가 어디에선가 꼭 황제처럼 차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작고 그저그런 3층 빌딩의 꼭대기 사무실에 보통사람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빨간 티셔츠만 아니었다면, 그저 눈이 크고, 눈썹이 짙고, 턱수염이 희게 센, 좀 별난 보통사람일 뿐, 연예인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실엔 흰색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또 그의 책상 옆엔 기타가 대여섯 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 것들이 그가 음악 하는 사람임을 새삼 일깨워줬다. 그러나 그의 방은 꼭 IT 회사의 CEO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사실 그는 연예인이 아닌 음반 업계에서는 「崔회장」으로 통한다고 한다. 그곳이 그의 사업을 총괄하는 我羅企劃 회장실이었다.
커튼이 쳐있지 않은, 밝고 큰 유리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한 무더기 쏟아져 들어와서, 그의 상반신에 멋진 하이라이트를 만들어 놨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얘깃거리가 됩니까?』
―되고도 남지요. 아주 특별한 분 아닙니까?
그는 이 말에 곧바로 반격했다.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아주 보통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서부터 얘기는 술술 풀려나갔다.
『지방에 공연을 가면 가수들이 거의 연습을 하지 않는답니다. 저는 밴드가 거의 초죽음이 되도록 연습을 합니다. 그러면 밴드들이 「다른 가수들은 악보만 갖다주고 그냥 무대에 올라갑니다. 그럼 그냥 하는데예」 그래요. 그럼 나는 이럽니다. 「이 사람들아, 그런 가수들은 노래를 잘해서 그래도 되지만, 나는 노래를 못하니까 연습을 해야지!」 그러면 아무 소리도 못해요. 이렇게 하는 것이 보통 사람이 하는 겁니다.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래서 羅勳兒씨가 여기까지 왔다 싶었다. 그래도 좀 어깃장을 놔 봤다.
―사실 그 말도 맞네요, 밤낮 하는 일이니까. 그 사람들은 눈감고도 할 텐데요 뭘!
『악보만 읽고 멜로디를 연주하는 건 고등학교 밴드부도 할 수 있어요. 멜로디 뒤에 있는 걸 읽어야지 프로페셔널입니다. 진정으로 음악 하는 사람들은 멜로디 뒤에 있는 걸 읽고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연습을 할 때, 「난 여기서 이렇게 부를 테니까 느그는 여기서 이렇게 해줘」 하고 맞춥니다』
―羅勳兒씨도 그렇게 노래 많이 했으면 더 연습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지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35년간 노래를 하긴 했어도, 전에 노래한 건 정말 모르고 한 겁니다. 지금도 제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이제 막 알기 시작한 단곕니다』
나는 羅勳兒씨를 만나러 오면서도, 그가 성공에 도취한 건방진 연예인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적잖이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를 듣고 보니 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名譽의 殿堂도 勳章도 싫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한번도 연습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가는데 羅勳兒씨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그게 무서운 겁니다. 전 프로지 않습니까? 프로는 프로 값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돈을 받고 노래합니다. 받은 값을 해야지요. 값은 그냥 안 나옵니다. 피나게 연습을 해야만 특별한 게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 노래를 듣는 분들한테 감동을 줘야 합니다. 노래 한 곡이 대개 3분간 나가는데, 이 3분 안에 감동을 주려면 참말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감동을 주는 「나만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간단했다.
『연습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이런 면도 있습니다. 羅勳兒씨가 너무 연습을 많이 해서, 감정적으로, 또 기교에 있어서 완벽하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우리 같은 사람은 따라 부를 수가 없어요.
『너무 잘 하시면 안 되지요. 그러면 저하고 자리를 바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큰일 나지요』
우리는 하하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나는 그 날(12월6일) 새벽 MBC TV에서 본 프로그램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그 프로그램에서 명예의 전당(가수 부문)에 올라갔던 것이다.
―내가 듣기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걸 스스로 반대했다던데요.
『그렇죠,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식은 땀이 났어요.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그렇게 거북할 수가 없었어요』
―무엇 땜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런 자리는 저희 선배들께 드려야 할 자립니다. 금년의 인기 가수를 뽑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런 거 안 받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왜 나갔어요?
『MBC에서 미리 선전(예고)을 해놨어요. 그랬는데 내가 안 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를 거 아입니까. 그렇다고 기자회견 할 만한 일도 아니고』
―훈장도 언제 사양했다던데요.
『그런 거 얘기할 자리도 아인데…. 사실 한 두어 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盧泰愚 대통령 때였는데요, 그것도 문제가 좀 있지요. 내가 받을 수 있을 때 같으면 받아도 괜찮지요』
―안 줘서 한인데, 주면 얼른 받지 뭘….
『아니죠. 찬물도 아래위가 있는데, 제 차례가 아니지요』
―그런 게 年功序列(연공서열)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 긴 세월을 몸을 바쳐 노래해 오신 분이 많은데, 눈에 보이는 부분만 가지고 얘기하면 안 되지요. 저는 지금 그런 거 받으면 안 됩니다. 그냥 나훈아 하는 것도 어려워요』
―그냥 나훈아란?
『그냥 노래하고, 힘들면 술도 한 잔 먹고, 실수도 하고…. 그런데 훈장 받으면 값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받는 건 좋을 지 몰라도 그러고 나선 난 어떡하란 말입니까? 지금도 그런 거 생각하면 그냥 뒷골이 땡겨요. 우리 선배님들은 참 고생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지금 젊은 가수들 히트 하나 하면 수십 억을 법니다. 우리 선배님들은 그렇게 히트 곡을 많이 가지고 계신데도 밥도 못 먹고, 제대로 잘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불러온 분들입니다. 그렇게 해 온 선배님들이 계셔서 오늘 우리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을 못 본 체하고 제가 훈장을 받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요? 말도 안 되지요!』
『뽕짝은 영원하다』
―오늘 새벽 MBC TV를 보니까 GOD와 함께 출연하셨던데, 요즘 젊은 사람들 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단 이것도 한 유(類)의 노랩니다. 이걸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나쁘다, 이렇게 평하면 안 됩니다. 유행가(流行歌)가 뭡니까? 흘러(流) 가는(行) 노래(歌)입니다. 흘러가는 노래 중에 이런 노래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요즘 젊은이들이 50∼60세쯤 됐을 때도 요즘 그런 노래를 부르며 좋아할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제가 디너쇼를 하면 표(한 장에 보통 15만원)가 사흘 안에 다 팔립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직도 뽕짝 이기(이게) 힘이 있는 깁니다. 뽕짝은 영원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회사에 들어가면 노래방 가서 무슨 노래 부르는지 아십니까? 뽕짝을 불러요. 젊은 사람들이 잠시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나이 좀 묵고 그러면 「영영」, 「무시로」 이런 내 노래로 돌아오는 겁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뽕짝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뽕짝론은 계속됐다.
『우리 노래가 뽕짝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밥 먹고 나서, 아니면 술 한잔 먹고 나서, 기분이 좋으면 젓가락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춥니다. 여기에 (실제로 손으로 장단을 치며) 가장 잘 어울리는 리듬이 뽕짝입니다. 밥도 먹었으니 배도 부르고, 술도 한잔 먹었으니 기분 좋죠. 그럼 장단 맞춰 흥얼거리며 노래를 하는 겁니다. 이기 바로 뽕짝입니다』
얘기가 미국으로 건너뛴다.
『미국에선 뽕짝이 나올 수가 없어요. 미국 사람들은 땅이 하도 넓어서 말을 타고 다니게 돼 있어요. 그래서 말 잔등 위에서 말발굽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릅니다. 떠그덕, 떠그덕, (노래부르며) 「아이 원어 고 홈」…. 이게 미국 뽕짝이에요.
반면 우리는 걸어다녔어요. 걸어다닐 때의 리듬이 또 바로 뽕짝이에요. (발바닥 장단을 치며)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그런데 지금 집은 없어도 차는 갖고 있는 시대가 됐어요. 그래서 우리 뽕짝도 달라지고 있어요. 조금 리듬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지금 자동차의 평균 속도가 시속 40km라면, 차를 달리면서 카세트를 들을 때, 그 속도에 어울리는 리듬이 돼야 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빨라지거나 아니면 그 리듬에 맞게 완전히 느려지거나…』
―요즘 랩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걸 우리 한국 문화라고 할 수는 없지요. 미국에서 건너온 거지요. 지금 후배들이 하고 있는 음악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봐요. 다만 한 가지, 대부분이 외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그런 음악을 하고 있어요. 우리 땅에서 태어나서 우리 된장국을 먹고 우리 정서 속에 살면서 이런 거 하면 더 좋겠지요. 그런데 외국서 살다 와서 말도 잘 못하는 젊은이들이 이런 노래를 불러서 지금 젊은이들의 음악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기 그기 좀 그래요』
―그런데 그게 젊은이들한테 잘 먹히고, 또 그게 동남아와 중국에 가서 韓流 열풍도 일으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미국 거라서 그렇지요. 사실 우리 리듬이면 동남아에서 먹히기가 어렵지요』
―詩도 쓰신다면서요?
『아, 이건 詩라기보다는요, 메모 같은 겁니다. 제가 작곡을 하잖습니까? 곡에는 꼭 詩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詩는 그 속에 멜로디가 들어 있습니다. 작곡가가 곡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 詩 속에 있는 멜로디를 끄집어내는 거지요』
―어떤 때 메모를 합니까?
『저는 마음이 편하고 행복할 때는 생각이 안 나요. 몸과 마음이 힘들 때 별별 생각이 다 나지요. 행복했던 생각, 아팠던 생각…. 그러니까 전혀 생각지도 않은 글을 쓰게 됩니다. 지금도 제 차 속엔 기타가 있습니다. 또 책도 10권 이상 가지고 다니면서 봅니다.
밤에 부산서 공연이 끝나면, 그날로 밤에 자동차를 타고 올라옵니다. 공연이 끝나면 참 힘들지요. 그런데 차 타고 올라오면서 밖을 쳐다보면, 차창 밖이 그냥 詩입니다. 별도 있지요, 강이 흐르지요, 바람도 불지요, 저 산너머 추억도 있지요, 저 앞 먼 곳이 또 보이는 듯하죠…. 차창 밖에 아픈 추억도, 좋은 추억도 다 있어요. 그걸 주어 담는 거죠. 글로 막 쓰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서 그냥 기타를 치면서 그 속에 빠지는 겁니다. 그럼 한 곡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두툼하고 작은 노트를 보여줬다. 나는 그 가운데 메모된 가사 하나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기타를 가져와 쳐 가면서 최근에 작사·작곡한 「空(공)」이란 노래까지 불러줬다.
그 가사는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로 시작됐다. 그의 인생철학이 가사 속에 잘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곡은 조금 빨랐고, 창법은 나훈아 창법으로 사근사근 나가다가 꺾어져 넘어가고, 그러다가 또 힘차게 뻗어 나갔다. 히트예감이 들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하는 「사랑」이란 노랜 작사·작곡 다 한 거지요?
『그렇지요, 그건 밤 3시쯤 자다가 일어나가지고 5분 만에 만들었어요. 그냥 막 詩와 곡이 나오는 때가 있습니다』
『李美子가 있어 행복하다』
―李美子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이구, 그런 분이 우리 대한민국에 뽕짝 가수로 계시다는 걸 생각하면 참 행복하죠. 그런 분들이 안 계시면 한국의 노래가 정리되지 않습니다. 여자가 부르는 뽕짝, 그건 그냥 李美子 스타일이라야 합니다. 남자가 부르는 뽕짝, 그건 그냥 羅勳兒 닮아야 합니다, 하하…. 뒤집고, 꺾고 해 쌓고, 전부 그래 가지 않습니까?』
―그럼 나훈아 이전엔?
『제가 나오기 전엔 뒤집고 꺾고 하는 게 없었습니다. (노래 부른다)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또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 보면 시들하고…」 이렇게 얌전하게 불렀지요. 저처럼 (노래) 「가지 마아오오 가지 마아오오…」 이렇게 꺾는 기 없었어요』
―허, 노래를 들으니 그 전과 아주 달라졌군요.
『그렇죠, 저부터가 큰 전환점이 됐지요』
―그런 羅勳兒 창법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전 어릴 때부터 민요를 좋아했습니다. 어머니가 제 손을 잡고 민요하는 데 자주 데리고 가셨거든요. 그때 그런 창법이 몸에 익숙해진 겁니다. 꺾는 창법이 민요에서 나온 겁니다. 보세요. (노래) 「아아리 아아리랑 스리 스으리랑…」 이런 것들이 다 꺾기 창법 아닙니까』
―요즘 현철·태진아·송대관 이 세 사람이 라이벌도 아니면서 라이벌처럼 하면서 트로트 부흥운동을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들도 인기가 있거든요. 인기는 그냥 얻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뽕짝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앞서 가도 안 되고 한 발짝만 쓱쓱 앞서가야 합니다』
그의 뽕짝론은 계속됐다.
『뽕짝은 김치 같아요. 우린 김치 안 먹고 못 살아요. 뽕짝 없이도 못 살지요. 제가 일본 가선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뽕짝은 김치다, 일본 뽕짝은 다꾸앙(단무지)이다」 그럼 사람들이 와 웃습니다.
대중가요가 우리 서민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노래라는 것은 기후, 인간성, 지역적 조건, 음식, 이런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 뽕짝과 일본 뽕짝은 서로 닮아서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노래 속엔 일본과 다른 꼭 하나가 있습니다. 대륙 기질이 있습니다. 일본 노래엔 그게 없어요』
―羅勳兒씨 노래 가운데 어떤 게 대륙 기질인가요?
『(노래)「녹슬은 기이찻길아아아…」 하고 내뻗는데. 일본 노래엔 이런 게 없어요. 그냥 두리뭉실 넘어가지요. 일본 가수들은 한국에 와서 절대 히트 못 합니다. 간지러워요. 그 사람들의 음악의 흐름은 바다의 파도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수들은 일본에 가서 히트할 수 있군요.
『그것도 힘듭니다』
―김연자씨 있잖아요?
『김연자씨도 히트는 못 하고 있지요. 쇼 무대를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그럼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슴 아프게」는 왜 일본에서 불리느냐? 그건 여기서 히트한 게 건너간 겁니다. 일본 엔카(演歌)를 한국 가수가 불러서 히트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羅勳兒씨도 일본 가서 그런 거 시도하셨지요?
『했죠. 그러나 너무 힘들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대륙성 기질을 노래로 듣고 「와아, 잘한다!」 할 수는 있어도 가슴에 오는 건 아니거든요. 이걸 쉽게 알고 덤비면 큰 일 나죠』
마도로스 아버지 밑에서 裕福하게 자라
그는 1947년 2월11일, 아버지 崔英錫(73세시 작고)씨와 어머니 洪聖念(80) 여사와의 사이에서 2男2女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 成基씨(56)는 현재 요식업을 하고 있고 그 밑으로 여동생이 둘이 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주르르 흘러 나왔다.
『부산시 동구 초량 2동 415번지 7통 3반입니다』
부산 사람이 아니랄까 봐 몹시 겁이라도 먹은 사람 같았다. 그는 그곳에서 초량초등학교와 대동중학교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서 서라벌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버님은 뭘 하셨습니까?
『배를 타셨습니다. 마도로스였어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무역선을 타셨습니다. 아프리카까지 다녀오시곤 했습니다. 한 번 나가시면 6개월도 걸리고 1년도 걸리고 그랬죠. 그러면서 무역도 하셨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퍽 어렵게 자랐다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 저는 아주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오신 유성기도 있었습니다. 또 그때 벌써 제 형하고 둘이 서울로 유학을 올 수 있었으니까요. 그때 밥먹는 것도 힘들 때 아녔습니까?』
―그래 어려서도 가수가 될 생각을 하셨습니까?
『어려선 저는 클래식 가수가 될라고 했습니다. 5학년 6학년 때,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대회에서 연속으로 두 번 1등을 했습니다. 6학년 때 지정곡이 「소나무야, 소나무야…」 하는 「소나무」였고요, 자유곡은 「깊은 산 속 옹달샘…」이었지요』
―서울 유학은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형님이 서울서 학교를 다녔는데, 저도 그냥 가고 싶어서 올라왔어요. 형과 함께 장위동에서 하숙을 했습니다』
―본명(崔弘基)이 참 좋은데요. 왜 이름을 바꿨습니까?
『노래를 처음 시작하고 나서 최홍기가 그냥 보통 사람 이름 같아서 崔勳이라고 할라고 했죠. 그런데 崔씨가 영 예술하는 사람의 성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좀 기억하기 쉬운 성을 찾은 게 羅씨예요. 그담에 勳자를 붙이니까 兒자는 그냥 나오더라구요. 이름이 「훈」이라면 부를 때 「훈아」 카고 부르잖아요. 그래서 羅勳兒가 된 겁니다. 한자로 써 놓고 보니까 기가 막혀요. 어린 아이(兒)가 훈장(勳)을 받는 것 같은 이름이잖아요』
―고등학교 이름이 서라벌 예술고등학굔데 예술을 집중적으로 배우셨나요?
『연극, 음악, 미술 이런 걸 많이 가르쳤습니다』
―공부는 잘했던가요?
『못한 공부는 아니었거든요. 중학교때 선생님이 반에서 5등 안에 들어야 서울 가는 원서를 써준다고 해서, 제가 열심히 했더니 반에서 2등을 했고, 전체에서 7등을 했어요』
―서울 와서 학교 생활은 어땠어요.
『공부는 제대로 안 했습니다』
―羅勳兒씨가 소위 일류학교에 진학했더라면 지금처럼 가수가 안 됐을 것 아닌가요?
『당연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수가 됐다고 아버지께서 10년 전 73세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저를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아니 「천하의 나훈아」가 됐는데도!
『그럼요. 은퇴하고 서울에 올라와 사셨는데 그때까지도 저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뺑 돌아버린 레코드社 사장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제 하셨습니까?
『사실 전 너무 쉽게 가수가 됐습니다. 제가 가수가 되기 위해 고생한 시간이 한 시간도 안 되니까요』
―참 이상하네! 지금은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하는데!
『그때 난 클래식 성악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냈다가 아버지한테 너무 혼이 나서 내놓고 말할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저한테 판검사나 의사가 되라고 하셨죠. 그래도 제가 우리 형제들 중에선 공부를 좀 낫게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저한테 기대를 많이 한 겁니다. 그런데 제가 느닷없이 노래를 해 놓으니까 아버지가 펄쩍 뛰신 거지요』
―그래 어떻게 가수가 되셨어요?
『아버지 몰래 한 겁니다. 65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작곡가 심형섭씨가 학교 바로 옆 정릉에서 음악학원을 열고 계셨어요. (노래) 「물어물어 찾아왔소, 그 님이 계시는 곳에」(임 그리워)를 작곡하신 분입니다. 그 학원에 친구 따라 놀러 다녔는데, 거기 가서 제가 가끔 노래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저한테 말은 안 하셨지만,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아요. 후에 그 분한테 들은 얘긴데, 그때 내가 노래를 너무 잘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분이 오아시스 레코드사의 손진석 사장님하고 친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분이 손 사장님께 얘길 했대요.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이게 아주 쥑인다, 물건이 될 것 같다」 이랬다는 거요. 그러면서 「모른 척하고 한번 와서 보실랍니까?」 이래 됐나 봅니다. 말하자면 선보러 오락칸 거지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거기서 놀러 오라고 해서 갔어요. 갔더니, 그 분(심형섭)이 「노래 한번 해 볼래?」 그래요. 「어 좋지!」 뭐 뺄 것도 없어서 노래를 몇 곡 불렀어요. 그러면서 뒤를 보니까 나이 먹은 분들이 두세 분 앉아 계시더라구요.
그때 내가 당시 유행하던 「라노비아」도 불렀어요. 그랬더니 손 사장님이 내 노래를 듣고 시쳇말로 그냥 뺑 돌아버린 겁니다. 생긴 것도 시커멓고, 눈썹도 시커먼 놈이, 아, 부르는데, 그기 아닌기라!
그거야 그렇지요. 제가 그때 학교서 발성연습을 많이 했으니까. 기본이 어릴 때부터 돼 있었으니까요. 사실 지금도 두세 시간 혼자 공연해도 깨딱없는 게 그것(기본)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 손 사장님한테서 「취입 한번 안 해 보겠느냐」는 얘기가 왔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여기까지 오는 일이 너무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힘 하나 들이지도 않고,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거기까지 간 겁니다.
그때만 해도 LP 속에 한 곡 취입해서 판을 내는 데 6만원을 내야 했습니다. 그때 국민주택이 20만원 할 때니까 얼마나 큰돈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나한테는 돈이고 뭐고 밥 사줘 가면서 공짜로 내주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거저 취입을 했습니까?
『그렇지요. 「취입하자」 해서 「그래 뭐 해 보지!」 한 겁니다. 김영광씨가 작곡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 또 「천리길」 이런 곡을 포함해서 네 곡을 받았는데 연습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마장동이란 녹음실에서 녹음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기계에 두 채널밖에 없어서 노래 한 곡에 한 군데만 틀려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어요. 그래서 네 곡을 취입하자면 꼬박 하루가 걸리는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 저는 네 곡을, 연습 한 번 하고 취입하고, 연습 한 번 하고 취입하고…, 이렇게 한 번도 안 틀리고 6분씩 네 곡을 했으니까, 4×6=24에 앞뒤에 몇 분 더해서 딱 30분 만에 끝내고 나와 버렸어요. 그랬더니 어른들이 잘했다고 자장면하고 탕수육을 사줘서, 그걸 실컷 먹었어요』
뭉테기 돈에 퍼블릭 카에
―계약서는 썼던가요?
『계약서고 나발이고 없었지요. 내가 돈을 줘야 하는지, 내가 돈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레코드를 낸 겁니다』
―그담부터 계산이 복잡했겠네. 이거 큰일 났네!
『큰일 났지요. 그담부터는 회사에 가면 그냥 뭉테기 돈을 주는 겁니다. 심심해서 회사에 들리면 손 사장님이 50만원도 주고 100만원도 주고…, 그러더니 퍼블릭 카라는 것도 한 대 사주더라구요』
―학교는?
『3학년이 됐는데, 학교도 제대로 안 가는 겁니다. 이거(노래)에 바빠져 버렸으니까』
―레코드 내고 나서 방송사에 잘 봐달라고 외교도 하고 그래야 할 텐데, 그런 것도 했나요?
『그런데, 이기 거꾸로 된기라. 라디오에서 먼저 나와달라꼬 난린기라! 내가 그런데 다니기도 전에 라디오에서 펑펑 쏟아져 나와 버렸어!』
―또 큰일 났네! 부모님한테 들켰군!
『그런데도요, 우리 할머니하고 우리 어머니는 그게 난 줄 몰라! 왜냐하면 이름이 나훈아니까! 아버지는 외국에 가 계시고』
―처음 히트한 게 무슨 노래였지요?
『「천리길」이었어요. 오아시스에서 여러 사람이 내는 LP에 내 노래 「천리길」 한 곡을 끼워 넣어 먼저 낸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약속」을 차례로 낸 겁니다 한 곡에 6만원씩 돈을 내고 여럿이 판 한 장을 내는 데에, 돈 안 내고 무임승차한 내 노래를 하나씩을 끼워 넣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던 거죠』
羅勳兒의 데뷔로, 고등학생 崔弘基가 살판났을 뿐만 아니라, 오아시스도 살판이 났다.
『그때 사실은 오아시스가 빚에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노래가 히트하니까 빚을 다 갚고 벌떡 일어서게 돼버린 겁니다』
그런데 好事多魔(호사다마)라고 문제가 생겼다.
『「천리길」이 전국의 라디오에서 모두 1위곡으로 올라갔을 때 금지곡이 돼버렸어요. (노래) 「돌부리 가시밭길 산을 넘어 천리 길」 하는 노랜데, 이게 배호의 「황금의 눈」, (노래) 「사랑을 아시나요, 모르시나요」와 멜로디가 똑같다고 해서 금지곡이 됐습니다. 배호씨가 저보다 1∼2년 선밴데, 한참 날릴 때였죠』
『가수 안 됐으면 감방에 있을걸』
그러나 금지곡 결정도 羅勳兒의 수직 상승을 막지는 못했다.
『금지곡이 되니까 방송에 못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손 사장님이 바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낸 겁니다. 그랬더니 이게 또 굉장한 히트를 한 겁니다. 그러고 나서 「물어 물어 찾아 왔소」(임 그리워)가 또 터졌지요! 「가지마오」가 터졌지요! 계속 터지니까 사장님이 돈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 됐어요』
―그러면 羅勳兒씨도 돈을 주체하지 못했겠네!
『돈이 얼맨지도 모르고 자꾸 받았는데, 친구들하고 다 써버렸지!』
―저런!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뜨니까 오아시스 사장이 아버지한테 인사를 가자캐요. 내가 얘길 안 했더니 우리 집이 못사는 줄 알았는지 쌀 한 가마를 지프에 싣고 돈 50만원을 봉투에 넣어 갖고 부산으로 내려간 깁니다』
―羅勳兒씨도 이제 이만하면 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겠죠.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 집에서 그만 난리가 난 깁니다』
―왜요?
『그때 우리가, 아버지가 외국에서 들어오신 줄 알고 갔어요. 그때가 여름입니다. 아버지가 하얀 모시옷을 입고 계셨어요. 들어가자마자 손 사장님하고 큰절을 했어요. 「왜 왔냐?」 그러셔서 손 사장님이 「사실은 (아드님이) 가수가 돼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서 50만원이 든 봉투를 드렸어요. 쌀은 운전기사가 밖에서 내려놨고. 그걸 보고 아버지가 「돈 집어넣어라, 쌀도 도로 가져가라」 하시면서 난리를 쳐서 손 사장님이 그냥 다 가지고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 길로 병원으로 가고』
―아니 어디 맞았습니까?
『혈색이 안 좋다고 해서 아버지 친구분이 경영하는 병원에 저를 집어넣었는데, 사실은 서울 가서 그 짓 못 하게 하느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입원하길 참 잘했어요. 가서 보니 폐가 안 좋았어요. 그래서 그때 치료를 받아서 다 나았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저를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얼마나 고집이 세셨던지…』
―지금도 가슴에 맺혔겠군요.
『그럼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1년에 몇 번씩 경기도 이천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푹 울고 옵니다』
―아버지 말씀 안 들은 게 후회됩니까?
『안타깝죠. 지금도 공부를 더 했더라면, 하는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그때 羅勳兒씨가 가수가 돼서, 그야말로 前途(전도)가 洋洋(양양)하게 잘 나갔지만, 만약 가수가 안 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죄송합니다. 틀림없이 깡패가 돼서 감방에 드가(들어가) 앉아 있을 깁니다. 제 친구들도 그런 얘기를 해요. 건달들 마지막 가는 곳이 거기 아입니까? 틀림없을 깁니다』
―그런 소질은 좀 있으셨던가요?
『제가 경찰서에 폭력으로만 일곱 번 드갔다 나왔으니까요. 상대가 전부 깡패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나온 깁니다. 일반 시민을 때렸다든가, 내보다 약한 사람을 때렸다면 그냥은 못 나왔겠지요』
―그래 그런 사람들하고 싸워서 이깁니까?
『제가 상당히 빠릅니다. 그리고 좀 셉니다』
시민회관서 공연중 怪漢과 격투
―인기인이 웬만하면 참아야지 왜 싸웁니까?
『연예인들한테는 건달들이 달라붙습니다. 내가 공연하는데 건달이 와서 괜히 객석에 앉아 있는 여자들 젖가슴을 만지면서 상소리를 합니다. 그러면 객석에서 「와, 와!」 해쌓고 난리가 푸썩 납니다. 그럼 공연이 되겠습니까? 그때 참아야 하는데, 저는 그걸 못 참고 「야, 니 이리 와!」 해서 불러다 놓고 한 방 멕이는 겁니다』
―왼쪽 뺨 위에 있는 그 상처(5cm쯤)가 공연하다 사이다 병에 찍혀서 다친 거라죠?
『그때가 72년 6월이었어요.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하는데, 누가(金OO·당시 29세) 올라와요. 전 누가 악수하러 올라온 줄 알았습니다. 멋도 모르고 손을 내미는데 그냥 사이다 병 깨진 게 들어오는 겁니다. 그 사람은 노래를 못하게 제 목을 찌를라구 했대요. 그때 목을 찔렸으면 죽었지요. 얼른 피해서 뺨 위에 찍힌 겁니다. 그런데도 계속 사이다 병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 무대에서 8분을 싸웠습니다』
―그 난리가 났는데 사람들이 구경만 하고 있었나요?
『밑에서는 이걸 쇼로 알고 구경을 한 겁니다. 그땐 「다치마와리」(난투)라고 무대에서 싸우는 연기를 하고 그랬거든요. 박노식씨 같은 분이 그런 연기를 잘했죠. 이게 그런 건 줄 알았던 겁니다. 臨席 경찰도 그런 걸로 알고 보고만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치고 받고 하다가 보니까 위치가 바뀌어서 내가 피 흘리는 게 보였고, 또 피가 객석으로 팍팍 튀니까 관객들이 막 울고 난리가 났죠. 그러자 내가 그 사람 무릎을 꿇렸고, 경찰이 올라왔죠. 그래서 그 사람을 잡았죠』
―그때 南珍씨가 시킨 거다, 아니다 해서 말썽이 많았는데….
『남진씨가 시킨 건 아니었어요. 후에 남진씨가 얘기를 했는데, 그 사람이 좀 모자란 사람이었는데 자기를 찾아와서 「나훈아를 죽이겠다」며 횡설수설 하면서 귀찮게 하더래요. 그래서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데리고 나가 보내면서 5만원을 줬대요. 그러니까 이 모자란 사람이 「아, 이거 죽이라는 거구나」 하고 생각한 것 같아요』
―남진씨와 라이벌로 한국 가요계를 양분하다시피한 기간이 있었지요.
『그때가 참 황금시대였지요. 대한민국의 가요역사상 그런 때가 다시 오기가 어려울 겁니다. 경쟁도 했지만 相扶相助(상부상조)하기도 했지요. 인기를 얻는 데 서로 도움이 됐어요.
모든 면에서 그렇게 라이벌이 될 만한 상대를 서로 만나기가 힘들었죠. 고향도 호남(남진) 대 영남(나훈아)이었고, 생긴 것도 한쪽(남진)은 아주 잘생겼고 이쪽(나훈아)은 소도둑 같고, 노래하는 스타일도 저쪽은 엘비스 프레스리처럼 막 춤추면서 하고. 이쪽은 거의 서서 하고…. 그 당시에 또 金泳三씨와 金大中씨가 영·호남으로 서로 라이벌이고. 그래서 정치는 누구와 누구, 노래는 누구와 누구, 이랬죠』
『나를 부르려면 1억을 내야 한다』
―개인적으로 南珍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만한 가수가 만들어지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노래 잘하면 얼굴이 좀 그렇거나 키가 작거나 그렇죠. 다 갖추기가 참 어렵죠. 그런데 남진씨는 다 갖췄어요. 거기에다가 저보다 훨씬 더 연예인에 맞는 성격까지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南珍씨는 왜 조용할까요?
『아마 관리 때문이겠지요』
―관리는 어떻게 하는 게 잘 하는 겁니까?
『별(스타)은 별이어야 합니다. 별은 구름이 조금만 끼어도 안 보여야 합니다.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별은 별이 아닙니다. 별은 하늘에서 반짝반짝 스스로 빛나야 합니다. 빛날려면 항상 닦아야 합니다.
내가 저 동네 아저씨 같다면 사람들이 돈 주고 시간 버려 가면서 왜 보러 옵니까. 공짜표 줘도 안 올 겁니다. 참 TV에도 잘 안 보이고, 볼락캐도 방법이 없고, 보고는 싶은데…, 이럴 때 사람들이 보러 오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스탑니다. 우리는 꿈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무절제하게 오라는 대로 다 가면 안 되겠군요.
『그렇죠! 내가 가야 할 자리를 골라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누가 말해도 설 자리가 아니면 절대 안 섭니다』
―그러면 너무 비싸게 군다고 안 할까요?
『욕을 먹어야지요. 미국서 제가 신문을 보니까, 일반대중 가운데 30%는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야 슈퍼스타가 된답니다. 너나 나나 다 좋아하는 사람은 슈퍼스타가 아니라 그냥 스타라는 겁니다. 싫어하는 사람 30%가 있어야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겁니다. 저는 욕을 많이 먹습니다. 방송사에서 제일 많이 욕먹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출연 교섭 한번 할래도 「더러워서 죽겠다」고 그래요.
우리 가수 가운데 학벌 좋고 공부 잘하고 노래 잘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분이 쇼하면 손님 안 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아주 점잖고, 교양 있는 말만 하고, 그러니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교수 같잖아요. 그러니까 안 가는 겁니다.
뭔지 모르지만 스캔들도 있고, 뭔가 좀 삐딱하게 굴기도 하고, 뭐 하나 할락카면 정신없이 난릴 직여 뿔고, 그러니까, 도대체 저게 뭐야, 한번 가보자, 이런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혹시 돈 많이 안 줘서 안 온다는 소리는 안 듣습니까?
『돈 많이 안 주면 안 갑니다. 그기 당연한 거 아니에요. 누가 대한민국에서 젤 비싸냐? 제가 젤 비쌉니다. 제가 2등의 열 곱은 더 받습니다』
―방송사에 모시려면 한 1억은 내야 합니까?
『방송사에선 가수들한테 출연료를 10만∼20만원밖에 안 줍니다. 그건 뭐냐? 내가 출연시켜 주니까 너희들 홍보가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는 안 합니다. 저를 출연시킬려면 적어도 2천만원 이상을 내야 돼요. 큰 프로그램에 나갈 때는 물론 1억이 넘어야지요』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인터뷰도 돈으로 따지면 수천만원 나가겠는데요.
『예, 인터뷰도 그렇습니다. 저와 인터뷰하기가 쉬운지 한번 물어 보십시오. 보세요, 이렇게 어려우니까 月刊朝鮮에서 吳 선생님 같은 분이 오신 겁니다. 그건 제가 만들어야 합니다.
제 공연을 보고 나서도 사람들이 만족을 하고, 밖에 나가서 자랑을 하게 해야 합니다. 관객들은 최고로 비싼 (보통 15만원) 입장료를 내고 왔지만, 내가 또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 주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내가 최고의 입장료를 내고 최고의 무대를 보고 왔다고 자랑을 하게 되는 겁니다. 가수는 이렇게 자랑거리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96년에 있었던 「KBS 설날 특집 나훈아 빅쇼」에선 다이아몬드 550개가 박힌 10억짜리 의상을 입고 등장하셨는데, 너무 호화롭지 않았나요?
『이건 꿈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짓을 해야 합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자랑을 해야 합니다. 「야, 나훈아가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나왔어. 너 그거 봤냐? 야, 대단하더라!」 이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번 돈 모두 사회에 내놓겠다』
―디너 쇼 한 번 하면 1억이 들어온다면서요?
『아니, 그거 들어와선 안 되죠』
―어, 그럼 2∼3억 들어오나요?
『하하하, 그게 정해져 있는 건 아니죠』
―그러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羅勳兒씨가 최종적으로 하려고 하는 건 뭡니까?
『제가 얘기를 해드릴 테니 더 이상은 묻지 마십시오. 제 큰애(최유민, 고3)가 곧 대학에 들어가는데요, 내가 그랬어요. 「공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시켜주마. 공부가 끝난 다음에는 너한테는 1원도 못 준다. 왜냐? 이건 내 돈이다. 내 돈은 무슨 돈이냐? 사회에서 날 사랑해 준 사람들이 있기에 내가 번 돈이다. 이걸 전부 사회에 주고 죽을 거다」 그랬어요.
더 묻지는 마십시오. 지금도 사회에 고맙다는 생각으로 내가 할 일을 생각하고 있고 또 실제로 하고 있습니다. 더 묻진 마십시오. 이건 아무도 모르니까요』
羅勳兒 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허연 턱수염,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 짙은 눈썹.
―흰 수염도 기르고, 희끗희끗하게 센 앞머리를 꼭 염색한 것처럼 헤어스타일을 꾸미셨는데, 이게 다 패션인가요?
『스타로서 컨셉의 하납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에 또 다른 모습으로 확 바꿉니다. 이게 우리가 늘 연구하고 노력해야 할 과젭니다. 보세요, 한 자리에 35년간 앉혀 놓고 차 한 가지만 먹어라 먹어라 하면 진저리가 날 거 아닙니까?』
―알았습니다. 나도 내일 머리를 삭 밀어버려야겠습니다. 그런데 아까 스캔들 말씀을 하셨는데, 金芝美씨하고 73년(나훈아씨가 26세 때)부터 81년(34세)까지 8년간 함께 계셨는데….
이 말이 나오자 그는 얼굴빛이 난처해지면서 『아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대답하기 곤란한 대목을 만난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뒤 차분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그때 그 여인하고 만나서 오늘 내가 여기에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羅勳兒가 金芝美 덕이다?
『아니 「덕」 하고는 의미가 좀 다르지요. 그때 참 저는 같이 있으면서 느끼는 게 참 많았습니다』
―어떤 걸?
『아, 내가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
―왜?
『저보다는 (金芝美씨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일곱 살 年上) 첫째 아는 게 많았죠. 그래서 내가 더 많이 알고 인격적으로 나아져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요. 또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세월이 어떤 세월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세월이었어요. 내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 부분이 아주 별다른 세계 같아요. 좋고 나쁘고는 따질 수 없지만…』
『金芝美는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女人』
―어떤 의미에서?
『어쩌면 그 세월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뻥 뚫린 세월이 아니었나 생각돼요』
―그 기간엔 노래도 안 했잖아요?
『정말로 중요한 건, 난 노래 부르는 걸 싫어한다는 겁니다. 노래하기 싫었어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해가 안 갈지 모르지만, 만약 제가 다시 태어난다면 저는 노래는 죽어도 안 부를랍니다』
―노래가 고맙잖아요. 羅勳兒를 우뚝 세워 놓고 5천만, 7천만 겨레가 다 사랑하고….
『그걸 내가 만족해야 하는데, 저는 이 직업이 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 속에서 빠져나와서 저를 볼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 제가 인기 속에 빠져 있으면요, 제 관리가 안 됩니다. 노래가 좋아서, 환장해서 노래를 하면, 그 속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때 노래가 싫어서 그만뒀나요?
『그때 당시는 「아아, 인제 노래는 싫어!」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럼 뭐하고 살려고 했습니까?
『나는 비즈니스가 좋았어요. 대전에서 「草原」이란 식당을 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작업복 입고 뚝딱거리고 그랬어요. 난 그런 게 좋았어요. 내 스타일이 그래요』
―거기서 배운 건?
『비즈니스 마인드를 배웠죠. 저는 지금도 노래를 하고 있지만 유별나게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분이 합치기 전까지, 물론 그 사이에 군대(공군)도 갔다 왔지만, 7년 가량 羅勳兒씨가 노래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 그 돈 어떻게 했습니까.
『다 가지고 가서 함께 합쳤지요』
―우리는 그때 떠꺼머리 총각이 봉잡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전혀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혹시 노망이 들어서 자서전을 쓴다면 이 얘기를 자세히 쓸 수가 있을 겁니다』
―지금 자서전을 한번 써 보시지.
『거짓말 안 할 자신이 없어서 못 씁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참말을 해도 사람들이 「그래, 노망들렸으니까 한번 봐주지」 이럴 때 써도 쓰겠다는 겁니다』
―그럼 이제 이런 생활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8년 동안 거의 매일 우리 집 앞에 기자들이 망원렌즈를 들이대고 땡겨놓고 있었습니다. 둘이 도마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는 것 자체가 옷을 잘못 입은 것처럼 힘들었습니다. 처음 2∼3년은 맞지 않는 옷도 불편을 못 느꼈습니다만, 사는 동안 결점도 보이고 그러니까 좋았던 것이 좋지 않은 것으로 바뀌기도 했고요.
이래저래 참 피곤했습니다. 다 지난 일인데도 노상 찍고 신문에 나고 그러니깐 아주 불편했습니다.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세월과 함께 쌓여간 겁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 여인은 내 인생에 참 필요했던 여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때까지 平坦大路를 걸어오던 내가 덜커덩 그 일이 있고부터 이것저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또 모든 것이 힘들게 됐죠. 그런 걸 겪으면서 제가 어른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겁니다』
40세에 道德經 읽고 크게 깨달아
어른 얘기는 좀더 계속된다.
『마흔 살이 됐을 때였지요. 그 전까지 저는 스스로 참 똑똑한 줄 알았어요. 마흔 살이 되면서 어떤 책을 보다가 그냥 뒤통수를 뚜디려 맞았어요』
―그게 무슨 책입니까?
그는 대답 대신 책상에 가서 「도덕경」을 가지고 왔다.
―어느 부분이 그렇게 충격적이던가요.
『전체가 그랬어요. 무슨 지침으로 삼기엔 좀 복잡했지만 내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엄습해 왔어요.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 뒤에 서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 서지 않고 한 발짝만 뒤로 서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언제부터 다시 노래를 시작했던가요?
『80년부터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金芝美씨와 73년부터 만나기 시작해서 81년에 헤어졌는데, 75년부터 노래를 안 부르다가 80년에 다시 시작한 거죠. 5년간 안 부른 셈이죠』
―참 어려웠겠네요.
『어려웠죠. 그러나 화려했죠. 내가 노래는 안 했지만 매일 주간지에 나서 나에 대한 관심은 많았기 때문에 내 노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았지요』
―그때 KBS에서 화려한 컴백 쇼를 했지요?
『그렇지요. 참 화려하게 했는데, 바로 방송출연 금지 처분을 받았어요』
―왜요?
『「울긴 왜 울어」를 불렀는데 저속하다고. 웃어도 시원찮은데 왜 우느냐, 이거죠. 그때가 80년대 초의 상황이니까. 다른 방송사에선 괜찮았는데 KBS만 방송금지 결정을 내렸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되니까 다른 방송사에서도 조심하게 돼서 제가 방송활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헤어질 때 돈이 한푼도 없이 나왔을 거 아닙니까?
『한푼이 아니라 숫가락 젓가락 하나도 없이 나왔습니다. 있는 돈 다 주고 나왔죠. 그러고도 더 주고 나왔어요. 그게 남자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게 무슨 얘기죠?
『그때 서울 청량리 맘모스 카바레에서 한 달에 1억원씩 받기로 하고 한 달치를 먼저 받아서, 3분의 2는 金芝美씨한테 주고 3분의 1로는 전세로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를 얻었습니다』
―방송은 못 하고 맘모스에서 노랠 하셨겠군요.
『그럼요. 거기서도 히트를 쳐서 맘모스가 돈을 무지하게 벌었습니다. 저녁마다 사람들이 몰려 왔으니까요. 거기서 하루 한 시간 이상 공연을 했습니다』
취입 2500, 작사·작곡 800, 히트 53曲
―헤어지고 나오니까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지는 내 꼴도 보기 싫어 하시고, 어머니는 왔다갔다 하시면서 밥도 해주고 하셨는데, 어머니는 가슴 아픈 자식한테 뭐라고 얘기하기 힘드니까 「밥이나 제대로 묵어야지, 이놈아!」 이러셨죠』
―再起하면서 새 곡을 만들어 히트했죠?
『일단 再데뷰하면서 내놓은 「울긴 왜 울어」가 히트를 했구요, 다음에 「사랑」, 「잡초」, 「18세 순이」, 「영영」, 「갈무리」, 「무시로」 이런 곡들이 연달아 히트했습니다』
―히트곡은 몇 곡이나 됩니까?
『제가 정확하게 따져 보니까 53곡입디다. 취입은 2500여 곡 했고, 작사·작곡한 것이 800여 곡 됩니다』
음반 낸 양을 앨범으로 따지면 200장이 넘고 판매량은 2000만 장이 넘는다고 한다.
―작곡이 참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가사 만들기가 어려워요. 가사만 만들면 그 속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니까요. 그리고 본능적인 감각이 있어야 해요. 억지로 만들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연예인들 중에 사업하다 실패한 분들이 적지 않던데.
『연예인들이 사업하다 실패하는 첫 번째 이유은 귀가 엷다는 겁니다. 남이 무슨 얘기 하면 「와, 맞아!」 하고 금방 그쪽으로 쏠립니다. 두 번째는 公과 私를 못 가립니다. 자기 기분대로 어린애처럼 할려고 합니다. 셋째로 연예인들이 절제된 생활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제대로 안됩니다. 우리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해뜨기 전에 생각해 놨다가 해뜨면 그대로 막 뛰어야 합니다. 뛰어야 할 시간에 자리에 누워 있으면 됩니까?』
그가 자신의 기획사 我羅企劃을 현재의 위치인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그의 건물에 세운 것은 86년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레코드 제작 판매업을 시작한 것은 89년 봄부터였다. 我羅企劃이란 이름 역시 그가 작명한 것이었다. 첫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 「사나이 눈물」. 이후 그는 과거에 그가 불렀던 노래도 편곡해서 새로 만들었고, 다른 가수가 부른 흘러간 가요도 새로 취입해 내놓았다. 후배 가수 주현미와 함께 메들리 카세트 테이프를 내놓아서 메들리 시장을 석권하기도 했다.
그가 내놓는 음반마다 잘 팔려 나가 이젠 「아라기획」 하면 도매상들이 선호하는 회사가 됐다고 한다.
韓·美·日에 알찬 회사, 재산 數百億
―이 회사가 업계에서 어떤 위칩니가?
『우리 회사는 구멍가겝니다. 그래도 아주 단단한 회삽니다. 지난번 IMF 때도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었어요. 회사가 일을 크게 벌여 놓고 있으면 위기가 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죠.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압축시켜 놨지요』
―직원은?
『다섯 명밖에 안 돼요. 우리가 하는 일을 다른 회사처럼 할려면 100여명 있어야 돼요. 우리가 레코드 회사를 제대로 할려면 CD와 카세트 테이프 만드는 공장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만 80∼90명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다 관리직 판매직 합치면 100여 명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음반 만드는 일을 오아시스 레코드, 아세아 레코드 이런 곳에 賃加工(임가공)으로 시키거든요.
제일 조심할 게 사람 쓰는 겁니다. 사람 많이 쓰는 건 비즈니스로는 제롭니다. 위기가 오면 큰일 납니다. 또 퍼뜩하면 「나훈아 회장 나와라!」 하고 난리를 직이면 얼마나 골치가 아픕니까.
임가공 맡기기 전에 우리가 기본적인 제작을 하는데, 이때엔 사람이 많이 필요 없거든요. 녹음실도 빌려서 하고요. 이렇게 제작한 걸 레코드 회사에 갖다 주면서 CD를 만들어 달라고 하죠. 그러면서 한 장에 얼마씩을 쳐서 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예를 들면, 한 달에 1억원벌 것을 임가공 회사에 주는 것 때문에 7천만원밖에 못 벌어요. 그러나 3천만원을 쓰는 대가로 우리는 IMF도 걱정 없고, 「나훈아, 나와라」 하는 일도 없는 거죠』
―여기서는 羅勳兒 노래만 냅니까?
『그렇지요. 제 음반만 내는 데도, 저희는 큰 레코드 회사가 가지고 있는 시장보다 더 큰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국에 도매상 32군데를 가지고 있습니다. 큰 회사는 오히려 28군데밖에 안 돼요』
―羅勳兒씨의 수입 가운데, 노래 불러서 들어오는 돈 하고 레코드 사업해서 들어오는 돈 하고 비율이 어떻습니까?
『비슷할 겁니다』
―와아!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미국에도 사업체가 있지요?
『미국 하와이에 무역 회사가 하나 있습니다. 음악과 전연 관계가 없는 회삽니다』
―일본에는?
『일본에는 아라기획과 똑같은 「서울뮤직」이란 회사가 있습니다. 거기도 현지 직원이 네 명 있는데 제 노래를 일본어 음반으로 내서 유통하는 회삽니다』
羅勳兒는 일본에도 진출해서 크게 활약했다. 그가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85년이었다. 그후 94년 그는 일본인이 작사·작곡한 엔카 음반 「忘却雨(망각우)」를 내면서 일본 가요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일본 노래와 그의 국내 히트곡(번역곡) 음반을 여러 장 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처럼 히트했습니까?
『히트 못 했습니다. 그래도 손해보는 건 아닙니다. 거기선 제가 방송도 안 하고 콘서트도 안 하니까 히트하기가 어렵죠』
그의 재산은 정확하게 얼마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만, 주위에선 어림잡아도 수백억원은 넘을 것이라고 한다.
羅勳兒의 담배 끊는 법
그는 金芝美씨와 헤어진 지 2년 후인 83년 후배가수 丁水卿씨(본명 정해인)와 결혼해서 다시 가정을 꾸렸다.
―부인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집사람이) 원래 노래를 할려고 했어요. 일본에 15세 때 가서 아이돌 가수가 됐는데 1년쯤 하다가 한국에서 공연을 한번 하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일본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러다가 그렇게 됐죠. 그때, 내가 뭔가 빨리 정리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지금 가정적으로 퍽 안정된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제가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 합니다. 그래도 큰놈이 「저는 이 세상에서 아빠를 가장 존경한다」고 합니다. 학교(하와이 소재)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서 써오라」는 숙제를 낸 모양입니다. 후에 학교에 한번 갔더니 선생님이 「얘 혼자만 아빠를 제일 존경한다고 써왔다」고 그래요. 그래서 한번 보고 싶었다는 겁니다』
―담배를 많이 피우셨다던데.
『하루에 네 갑이오. 그렇게 많이 피우던 담배를 안 피운 지 2년8개월째 됩니다. 사람들이 담배를 못 끊는 이유가, 최면에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담배가 아주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 끊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내년 1월1일부터 끊겠다」고 정하고, 「내가 담배 끊었으니, 나한테 담배 권하지 말라」고 선언을 하고 그러죠.
담배 끊을라면 담배를 아주 낮춰보고 비웃어야 됩니다. 담배를 가볍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부터 끊겠다고 정하지 않고, 어느 날 점심 때 점심 먹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자 이제부턴 담배 안 피워야지」 이러고 다신 안 피운 겁니다. 지금도 저는 「안 피운다」고 그러지 「끊었다」고 안 하지요. 누가 물으면 「앞으로 5년 뒤에 피울 거야」 그럽니다
담배를 끊으면 금단현상이 오지요? 그건 「이제 내가 담배를 끊었으니까 절대로 못 피운다」 할 때 오거든요. 그러나 저는 안 피우니까 또 피울 수 있죠. 그러니까 금단현상도 안 오죠. 이게 내 마인드 컨트롤이에요』
―어디서 들으니까 小食이 건강비결이라고 돼 있던데,
『저는 간이 남보다 훨씬 크고 위장이 남보다 작아요』
―아니, 간이 크다니!
『의사인 친구가 간을 보는 새 기계가 들어왔다고 한번 오라고 해서 가 봤죠. 제 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른 사람 간보다 배는 더 커요. 난 「간 크다」는 말만 들었지, 내 간이 그렇게 클 줄은 몰랐어요.
그 대신에 위가 작아요. 그래서 많이 먹고 싶어도 사실은 많이 못 먹어요. 小食을 하는 게 아니라』
―술은?
『요즘 좀 마십니다. 한 15년간 끊었다가 요즘 다시 마시기 시작했어요』
―대전에 (金芝美씨와) 있을 때 글씨 공부를 하셨다구요?
『사실은 그 전부터 배울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제가 氣가 짧아요. 그때까지 제가 책을 못 읽었어요. 갑갑해서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게 글씹니다. 먹을 갈라면 적어도 30분간은 가만히 앉아서 갈아야 합니다. 처음엔 이 먹을 가는 데 한 열댓 번은 일어났다 앉았다 했습니다』
―학원에 가서 배웠나요?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글씨도 쓰고 동양화도 좀 하고 그랬습니다』
―서양화는 어떻게 해서 하게 됐습니까?
『김수정(女)이란 서양화가가 있는데 그 집과 교유가 있어서 왔다갔다 했어요. 그 집에 가서 그 화가가 그리는 걸 보니까 한번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도를 좀 받아서 시작했지요』
―그것도 氣를 다스리기 위해서?
『그것도 그렇지만 우리는 혼자 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실 줄 모르지만 저는 돈을 받고 제 얼굴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래서 휘젓고다니는 것보다는 혼자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혼자 있을 때는 무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연예인들 가운덴 그런 때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그래서 短命하게 간 분들이 있잖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해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의 건물 2층 사무실 입구에는 꼭 고흐의 자화상 같은, 초록 바탕에 그린 그의 자화상(유화)이 걸려 있다. 같은 사무실 벽면에는 「여인의 눈물」과 「성령의 이미지Ⅱ」란 제목이 붙은 30호쯤 되는 유화 두 점이 걸려 있었다. 두 점 다 그의 작품으로, 1999년과 2000년에 한국미술인 선교회의 공모전에서 입선한 것들이다. 수준급 이상으로 보였다.
―國展에 입선한 적도 있습니까.
『사실은 지금 출품할라고 서양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서양화를 기리기(그리기) 시작한 지 6년이 됐습니다. 나 혼자 기리니까 잘 기리는 지 못 기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재작년(99년)에 미술인 선교회에서 공모전을 하길래 살짝 「최홍기」라고 이름을 써서 두 점을 갖다 낸 겁니다. 심판을 받고 싶어서 보냈는데, 어, 생각지도 않게 입선을 한 겁니다. 그래서 작년에 또 냈더니 또 입선이 된 겁니다! 그래서 조금 힘이 나서 지금 國展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政治보다 노래를 잘한다』
―그런데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주일씨가 국회의원 나갈 때, 사실은 당시 여당에서 프로포즈를 받았습니다. 그때가 1월이었는데 애들하고 스키장에 가 있었습니다. 아무 연락도 하지 말라고 하고 가 있었는데 우리 회사 尹 사장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좀 높은 데서 연락이 왔다는 겁니다.
「높은 데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끊어!」 그러고 열흘 후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들어보니 국회의원 하라는 겁니다. 그때 여당 당직자가 저녁약속을 하자고 해서 내가 전화로 「저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했더니 그쪽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정치를 좀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래요. 그 말 듣고 제가 당장 이랬어요. 「여보시오, 내가 정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 나는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울긴 왜 울어>를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잘 부른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이클 잭슨이 저보다 <울긴 왜 울어>를 더 잘 부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죠, 그거야 羅선생이 최고로 잘 부르죠」 「그러면 내가 뭘 해야 합니까? 정치를 해야 합니까? 노래를 해야 합니까?」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참 미워요.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뭘 하면 나라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 않고, 「아, 저놈 인기 있으니 내보내면 당선되겠다. 그럼 우리 당이 한 석 더 차지한다」 이런 생각만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국회가 왜 저 모양입니까? 돈 좀 있으면 국회의원 할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저 안에 국회의원 자격이 있어서 앉아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국회의원은 정말 엘리트가 해야 합니다. 잘 배우고, 사고가 똑바르고, 정말 국민들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앞으로 비례 대표제로 금배지를 달아준다면 슬그머니 받으시지.
『그러면 안 돼요! 저는 늙어서 바보가 돼도 여기 앉아 있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 후배들이 안심하고 노래 불러요! 』
―대한민국은 앞으로 잘 될 것 같아요?
『안 돼요! 교육이 이래 가지고는 앞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을 바꾸는 데에 돈을 많이 쓰겠습니다」 하는 후보가 나온다면 대통령으로 뽑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의 부인과 두 자녀는 미국 하와이에 가 있다. 아들 둘이 그곳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부인이 왔다갔다 하면서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 한다.
『노래 접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자녀들이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없었나요?
『혹시 다른 눈으로 보실까 봐 걱정입니다. 전에 우리 큰애가 한남동에 있는 아주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유치원에서 바자회를 하는데 한 아이 앞에 500만원씩을 부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애 엄마한테 그랬습니다. 「당장 그만둬!」 그러고 나서 유치원에서 어쩌면 이런 발상이 나올 수 있는지 여기저기 물어봤더니, 정말 이건 교육이, 교육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보내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사립학교는 특수층만 다니니 애들이 고생을 모르고 자라게 되고, 공립학교에 보내자니 썩은 데가 많고…. 그래서 초등학교를 SIS(Seoul International School)에 보냈어요. 얘(유민)가 나를 안 닮았는지 공부를 잘해요. 전교에서 1등을 해요.
하와이에 全미국에서 10大 명문에 들어가는 유명한 학교(초등·중등·고등)가 있는데 하버드 대학을 1년에 12명씩이나 보내는 곳입니다. 그 학교(중학 과정)에 유민이를 시험삼아 응시하게 했더니 수석으로 합격했어요. 외국인으로 수석을 한 게 처음이랍니다. 그래서 「에이, 니 공부 한번 해 봐라!」 하고 보낸 겁니다. 이왕에 세계를 무대로 살아볼라면 「니 미리 한번 본바닥에 가서 동창(친구)을 많이 만들어라」 이거지요.
왜 하와이를 택했느냐? 全미국에서 노란 사람이 큰소리 치고 사는 데가 바로 하와입니다. 얘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교 부회장을 했으니까요. 동양 애가 큰소리 치는 데가 거기 말고 어디 있겠어요. 대학교 때 가면 좀 다르겠지만, 그땐 본인이 인종의 벽에서 오는 어려움을 받아넘길 힘이 생길 테니까 그땐 문제가 없겠지요』
현재 큰아들 유민은 고등학교 3학년에, 둘째 아들 유빈은 같은 학교 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다.
―골프 잘 치세요?
『잘 치진 못하지만 핸디가 8∼9 정돕니다』
―어? 자주 나가세요?
『몇 달에 한 번 나갑니다』
―다른 운동은?
『근처 체육관에 가서 날마다 두 시간쯤 유산소 운동을 하고 사우나를 합니다』
―羅勳兒씨를 「트로트의 황제」라고 하던데.
『그렇게 하지 말라니까요. 보통 나훈아도 어려운데 황제는 무슨 황젭니까!』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뭡니까?
『조용히 노래를 접는 일입니다』
―접다니?
『노래를 접고, 편하게 살면서 책도 좀 읽고, 그림도 좀 그리고, 그러면서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왜 벌써 그만둘 생각을 합니까?
『그 동안에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지요. 말하자면 최고로 비싸게 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게 통했는데, 내가 「내 노래 들을라면 얼마 내!」 했을 때, 그걸 받아 주면 되지만 만약에 「그래? 그럼 그만둬!」 하면 나는 뭐가 됩니까? 그런 날이 기어코 옵니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 그만둬야지요』●
입력 : 2020.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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