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 | 548쪽 | 1만8800원
2022년 영국 부커상을 받기 전, 이 소설은 인도반도를 떠도는 ‘유령’과 같았다. 경계 너머의 존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존재. 스리랑카 작가인 셰한 카루나틸라카(48)는 영국에서 책을 내려고 7년을 분투했다. 2015년 스리랑카에서 ‘악마의 춤’으로 시작된 소설을 고쳐 2020년 인도에서 출간, 한 번 더 고친 끝에 영국에서 낼 수 있었다. 두 차례 전면 개고를 거친 것은 스리랑카의 비극적 현실에 책임이 있는 영국에 목소리를 전달하려는 의지였다. 스리랑카는 네덜란드와 영국에 400년 넘게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내부 균열이 커졌고, 독립 이후에도 민족·종교 간 갈등에 시달려야 했다. 스리랑카 작가로는 두 번째였던 카루나틸라카의 부커상 수상은 그래서 더욱 이례적이었다.
이 ‘유령’의 국내 출간을 맞아 서면으로 만난 카루나틸라카는 “책이 전 세계를 여행하고 있고 저 또한 함께 동행할 수 있음은 무척 멋진 일이지만, 많은 부분을 다시 써야 했기에 괴롭기도 했다”고 했다. 두 번의 개작에 대해선 “스리랑카나 거기 존재하는 유령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고쳤다”고 했다.
소설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유령’들의 이야기면서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추리 소설’이다. 소수 민족인 ‘타밀족’과 다수 민족인 ‘신할리즈족’ 사이의 분쟁으로 10만여 명이 죽은 ‘스리랑카 내전’(1983~2009)이란 소재가 생소하더라도, 책장은 쉽게 넘어간다. 주인공은 1990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살해당한 사진작가 ‘말리 알메이다’. 그는 저승으로 가기 전 유령들이 모이는 ‘중간계’에서 눈을 뜬다. ‘일곱 번의 달이 뜨고 지기 전까지 망각의 빛으로 들어가면 다음 생을 살 수 있다’고 안내받지만, 선뜻 빛에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카메라를 통해 생전 기억의 파편이 보이기 때문. 1983년부터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군 양측 모두에 고용됐던 그는 무고하게 죽은 이들의 사진을 여럿 지니고 있었다.
“형이상학적 저승 누아르”란 부커상 심사평처럼, 소설의 묘미는 유령과 인간의 미묘한 공존에 있다. 말리는 유령인 채로 이승에서 애인·가족·경찰 등을 따라다니며 자신이 죽은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산 자에게 그의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반면 유령인 상태에서 인간과 동물은 대화할 수 있다. 인간이 사후에야 동물과 대화가 가능한 이유를 서술한 부분이 압권이다. “그랬다가는 동물들이 불평을 그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학살을 더 하기 힘들어지니까. … 목소리가 덜 들릴수록, 더 쉽게 잊을 수 있다.”
책은 이처럼 잊혀 가는 스리랑카의 목소리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지로 빚어졌을 테다. 그는 “우리(스리랑카인)는 너무 쉽게 분열됐다. 이 아름다운 나라가 탐욕과 사소한 것들로 파괴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면서도 “저는 항상 희망을 갖고 있다. 다음 세대는 우리처럼 멍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작가는 콜롬보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영국·네덜란드·호주 등에서 광고 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그는 “크리켓 선수와 록 스타를 꿈꿨지만, 소설가를 꿈꿔본 적은 없다. 이야기 자체를 만드는 것 외에는 어떤 별다른 진로 계획 없이 첫 번째 소설을 썼다”고 했다. 이번 소설은 그의 두 번째 작품. 글쓰기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콜롬보에서 내전의 한가운데에 살았던 시절의 상상력이 글의 원료가 됐다. “(말리처럼) 전쟁터로 가 사진을 찍을 만큼 용감하지 못했지만, 영웅적인 인물에 대해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말리는) 1990년 국가에 의해 살해된 언론인 ‘리처드 드 소이사’란 실존 인물에게 영감을 받았죠.”
작가는 “대한민국과 스리랑카는 동족상잔의 역사 그리고 암울한 시대를 겪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후 여러분(한국인)은 멋지게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웠지만, 우리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를 찾기보다는) 책을 그저 하나의 이야기로 즐기길 바란다”고 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라고 했다. 책에서 말리는 죽음에 대해 복수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분노가 아닌 사랑의 힘이 지금 세상에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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