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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만들어진 신인가

Jimie 2024. 5. 3. 05:32

하느님은 만들어진 신인가

류지미 2023. 6. 11. 08:24

 

 

예수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을 멈추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예수는 멈추었다.

걸음을 멈춘 예수는 무엇을 했을까. 그 갈림길에서 예수는 어떤 일을 했을까. 예수가 택한 답은 무척 뜻밖이었다. 그는 ‘기도’를 택했다. ‘하늘의 뜻’을 묻기로 했다.

2000년 전 예수가 땀을 피처럼 흘리며 기도헀다는 겟네마니 동산의 올리브나무. 예수 당시에 있었던 올리브 나무의 씨앗이 떨어져서 자란 후손이다. 그러니 저 나무의 조상은 예수가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터이다. 백성호 기자

 

 

밤이 꽤 깊지 않았을까. 예수가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은 모두 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 예수가 몇 차례나 “깨어 있어라”고 당부했지만, 그들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의 갈림길’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다.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예수의 절박한 고뇌를 모르고 있었다.

 

 

㉞ 예수를 겨눈 배신의 입맞춤

올리브산의 겟세마니에는 거대한 올리브나무가 있었다. 어른들 여럿이 손에 손을 잡고 둘러서야만 껴안을 수 있을 만큼 컸다. 그 근처에 돌판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MY FATHER, IF IT BE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THOU WILT.(Matthew 26:39)”

올리브나무들 곁에는 장미가 피어 있었다. 풀들도 자라고 있었다. 그 사이를 거닐며 잠시 묵상에 잠겼다.

예수가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된 곳은 겟세마니 동산이었다. 그곳에는 올리브나무가 가득했다고 한다. 지금도 겟세마니 동산에는 아름드리 올리브나무들이 서 있다. 백성호 기자

 

2000년 전 이곳에 엎드려 기도했던 예수. 그가 섰던 삶과 죽음의 갈림길. 어쩌면 예수에게는 그 길이 갈림길이 아닐 수도 있었을까. 예수의 눈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는 외길일 수도 있었을까.

 

 

㉟ 닭 울음소리에 베드로가 통곡한 진짜 이유

예수는 올리브산의 겟세마니에서 체포됐다. 성전 경비병들은 밧줄로 예수를 묶었을 터이다. 손을 묶었을까, 몸을 묶었을까. 예수는 꽁꽁 묶인 채 올리브산의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그리고 언덕길의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해 카야파 대사제의 관저로 끌려갔다.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예수는 외로웠을 터이다.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예수가 겟세마니의 바위에 엎드려 기도할 때 제자들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예수가 체포되자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심지어 “가장 나이가 어린 제자는 몸에 두르고 있던 천까지 내던지고 알몸으로 도망쳤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한 패거리로 연루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직 베드로만이 멀찍이 떨어져 끌려가는 예수의 뒤를 따랐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 통곡교회에서 바라본 예루살렘성과 올리브산. 백성호 기자

예수는 혼자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칼과 몽둥이, 그리고 횃불을 든 적들만 있었다. 그러니 외롭지 않았을까.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유다 광야와 예루살렘을 

 

㊱ 하느님은 만들어진 신인가

 

카야파의 관저가 있던 골목을 걸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몰라봤을까. 예수 스스로 “나는 사람의 아들, 아담의 아들”이라고 하는데도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유대인들은 ‘그들이 상상하는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이 기대하는 하느님을 믿었다. ‘하느님은 이러이러할 거야,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지고 계실 거야.’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을 바탕으로 그려낸, 하느님에 대한 나름의 스케치가 있었다. 그 또한 우상임을 그들은 몰랐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에서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서 경전을 읽는 정통파 유대인도 보인다. 백성호 기자

 

나는 묻고 싶다. 그러한 하느님은 ‘만들어진 신’일까, 아니면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일까. 예루살렘의 골목길에서 요한복음서 1장 1절을 다시 펼쳤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렇다. 하느님은 원래부터 그냥 있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다. 시간이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지, 하느님이 시간 안에 종속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신’이다. 사람들은 신을 보지 못한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다. 그래서 자꾸만 빚어낸다. 손에 잡히는 신, 귀에 들리는 신,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든다. 그래서 ‘만들어진 신’이 생겨난다. 그러한 신이 바로 우상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역시 우상에 대한 비판이다.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 대해서만 말할 뿐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 ‘본래의 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도킨스는 ‘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가 심문받던 시각의 카야파 관저를 묵상했다. 잡혀간 예수가 있고,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다. 그 뜰에 있는 사람들은 신을 믿었다. 예수를 포함해 관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신을 믿었다. 다만 그 신이 ‘만들어진 신’인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인가 하는 차이가 있었다.

 

그 뜰에서는 예수만 홀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을 믿지 않았을까. 제사장도, 수석 사제들도, 최고 의회의 원로들도, 뜰에 몰려든 구경꾼들도 다들 ‘만들어진 신’을 믿고 있었다.

로마와의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됐다. 그 자리에 이슬람이 세운 성전이 들어서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모스크는 이슬람교 3대 성지 중의 하나로 꼽힌다. 백성호 기자

 

예수는 왜 “사람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했을까.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성전이 뭔가. 신을 만나는 장소다. 유대인들은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만들어진 신’을 만나지 않았을까. 예수는 그들과 달랐다.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에서 ‘만들어지기 이전의 신’을 만났다. 그러니 예수에게는 사흘조차 긴 시간이다.

 

만들어진 신은 우상이다. 그것은 신의 속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신을 만날까. 예루살렘 성벽 위로 높이 솟았던 성전일까? 아니다. 예수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한 바로 그 자리가 신을 만나는 자리다. 거기가 성전이다. 그러니 바로 지금, 여기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과 장소 말이다.

 

다시 물어보자. 어디가 성전인가? 우리가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가족을 만나고, 공부하고, 놀고, 일하고, 친구를 만나는 모든 시공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예수를 만난다. ‘만들어진 예수’가 아니라 ‘본래 있는 예수’를 말이다. 단, 한순간도 우리가 사는 곳을 떠난 적이 없는 ‘신의 속성’을 만난다.

 

아무도 그것을 몰랐다. 예수만 알았다. 그러니 “사흘 안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의 말은 그들에게 ‘신성모독’에 불과했다. 물음이 올라왔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심문하는 그 뜰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누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까.

종교의 신은 늘 우상으로 변질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종교의 교리도 늘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다. 백성호 기자

 

어쩌면 우리도 ‘예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신’을 빚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신을 만나기 위해 성전을 찾는 것은 아닐까. ‘내가 만든 신, 내가 만든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예수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향해 “신성모독!”이라며 정죄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사제 카야파처럼 자신의 겉옷을 찢으면서, 남들이 들으라고 목청을 더 높이면서 말이다.

 

짧은 생각

유대교는
계약의 종교입니다.

모세가
하늘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받는 시점부터
하느님(하나님)과 유대민족의
계약이 체결됐습니다.

내가 준
계명을 지켜라,
그렇다면
내가 너희 민족을
구원하리라.

계약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를 떠돌던
유대 민족은
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천막을 치고
잠시 머물 때는
반드시
성막을 쳐서
돌판을 그 안에 모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공간을
신이 임하는 장소,
신을 만나는 장소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신들의 영토를 갖게 되자
돌로 된 큰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게 바로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임하는 장소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다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성전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는 사실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그걸
가만히 두고 보셨을까,
그런 물음에 대해서
누구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라 잃은 유대인들이
무리지어 사는 곳에
시나고그(회당)가 생겨납니다.

유대의 신학도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전이 파괴된 것은
하느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이는
회당에도
하느님은 계시다.

하느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존재,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신 분이다.

 

 

이런 이치를
받아들이면서
유대교의 신학은
한 단계
더 올라서게 됩니다.

 

 

저는
한 일화가
생각나더군요.

누군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이 어디 있는가,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는가.
그걸
우리에게 보여 달라.
그렇게
따지고 보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바깥에 있다.

 

무슨 뜻일까요.
맞습니다.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지나오면서
교회도 고민이 많습니다.

코로나 기간에
사람들이
집에서 드리는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방역 규제가
끝난 뒤에도
교회를 찾는 교인들이
예전보다 줄었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습니다.

목회자들은
신을 만나는 성전이
예전보다
무력해질까 봐 걱정합니다.

젊은 교인들은
주일 예배를
반드시 교회에 가서
해야만 하는 걸까,
스스로 자문하기
시작합니다.

 

양쪽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양쪽 다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포인트가 무엇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주일에 우리가
교회에 가는
이유가 뭘까요.
저는 그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그게 일차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만나는데
더 도움이 되는 곳.

그곳을 선택하면
되지 않을까요.

장소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니까요.

 

만약
하느님이
교회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2000년 전에
하느님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다고 생각하던
유대인과 무엇이 다를까요.

최근에
열린 생각을 가진
한 목회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온라인 예배와
오프라인 예배,
모두가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다시 말해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느님,
그분을 만나기 위해
도움이 되는 곳.

거기가
바로
살아 있는 성전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