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성지도 발길 '뚝'…'석탄돌리기' 희생양 된 강원, 무슨 일
입력 2023.04.14 08:00
BTS의 앨범 재킷 촬영지로 유명해진 강원 삼척시 맹방해변. 서울에서 온 관광객 한모씨(28)는 “BTS 성지라고 해서 들렸는데 모래도 심하게 깎여 있고 주변이 공사판이어서 관광지 느낌이 별로 안 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해수욕장에는 관광객들이 BTS 사인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지만, 명사십리로 불리던 해변 주변에 공사 현장이 곳곳에 보였다. 약 3km 떨어진 해변에 아파트 5층 높이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석탄을 실은 배가 접안하기 위한 항만 공사였다. BTS 사인 왼쪽에 “석탄화력 연기 뿜는 삼척! 놀러 안갈래요!”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린 이유였다.
BTS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유명한 강원 삼척시 맹방해변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옆에는 화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그 뒤로 석탄을 수입하기 위해 건설 중인 항만이 보인다. 천권필 기자
수도권 황사·미세먼지 논란될수록 강릉은 분노
강원도 삼척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최근 강원도에는 대형 석탄화력발전소 3기가 신규 가동을 앞두고 있다. 강릉안인화력 2호기와 삼척화력 1·2호기다. 최근 준공한 강릉안인화력 1호기까지 더하면 총 4호기(4180MW 용량)가 강원도 동해안에 새로 들어서는 것이다. 풀가동시 강원도 전체 인구(153만 여명)의 두 배가 넘는 367만여명에게 1년 동안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용량이지만, 석탄이 만들어낼 전기에 적지 않은 강원도민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석탄발전소로 인해 청정 도시 이미지가 깨질까 우려하는 것이다.
수도권의 황사와 미세먼지 문제가 부각되면 발전소 주변 민심은 더 흉흉해진다. 강릉시 안인면에서 30년 넘게 막국수 식당을 운영해 온 안영주(45)씨는 “요즘 서울에서 미세먼지를 피해서 강릉까지 온다는 데, 여기는 발전소가 생기고 관광객 발길이 뚝 끊겨서 폐업 직전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이 정부의 탈석탄 기조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정부는 탈석탄 정책이 본격화된 2020년부터 대규모 석탄발전소가 밀집한 충남 보령 등에서 석탄화력발전소 6기의 가동을 중단했다. 다른 지역은 석탄발전소를 줄이는데, 강원도는 석탄발전소가 늘어나는 상황인 것이다. 이에 일각에선 강원도가 ‘석탄돌리기’의 희생양이 됐다는 주장이 나온다.
맹방해변에 건설 중인 삼척석탄화력발전소 항만의 모습
西에서 東으로 ‘석탄 돌리기’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정부는 2025년까지 총 12기(5740MW 규모)의 노후 석탄발전소를 폐쇄할 예정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 가동을 시작했거나 가동될 예정인 신규 석탄화력발전소는 총 7기(용량 7278MW)다. 발전용량을 기준으로 보면 폐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전기를 석탄발전소가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중 절반이 넘는 57%는 강원 동해안에서 만든다. 서(西)에서 동(東)으로 위치만 바뀌기는 상황이 대해 전영환 홍익대 전기공학부 교수는 “한국 정부가 진정한 탈석탄 정책이 아닌 결국 석탄 돌리기를 하는 정황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탈석탄은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꼽힌다. 2021년에 정부는 2030년 탄소 배출량을 2018년 배출량 대비 40% 줄이기로 했다.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탄녹위)’도 지난 달에 문재인 정부의 목표치를 계승하되 “석탄발전 감축 및 원전, 재생에너지 발전을 확대하는 등 청정에너지 전환을 가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탈석탄 기조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강원도는 반대의 상황인 것이다.
왜 동해안에 석탄발전소 몰렸나
최악의 미세먼지에서 벗어난 3월 7일 오후 강원 강릉 시내(오른쪽)가 선명하게 보인다. 왼쪽은 지난 4일 오전 모습. 연합뉴스
동해안의 신규 석탄발전은 2013년 이명박 정부 임기 말에 수립된 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추진됐다. 2011년 블랙아웃 위기를 겪으면서 전력 공급을 늘리고자 대기업의 발전 사업 기회를 열어줬고 포스코와 삼성 등이 참여했다. 바다를 통해 러시아산 석탄 등을 수입할 수 있고 폐광산 부지 등 값싼 땅을 활용할 수 있는 동해안이 최적지로 떠올랐다. 성원기 강원대 명예교수는 “당시만 해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생각하고 기업들이 석탄발전 사업에 뛰어들었다. 폐광산 부지에 석탄발전소를 지으면 환경 복원 비용도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국내 최대 석탄발전소 밀집 지역인 충남 당진시에서는 신규 석탄화력발전소를 지으려던 계획이 하나 둘 취소됐다. 2010년대 중반, 수도권의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해지면서다. 서해안 지역 석탄발전소가 수도권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꼽혔다. 2017년 충남 당진의 신규 민간 석탄화력발전소 건설 계획이 취소되고, 발전사인 SK가스는 석탄화력발전소를 지으려던 부지에 태양광 발전소를 지었다. 김정진 당진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수도권에 미세먼지가 강타해 민심이 악화하자 정치권에서 서부권 최대 화력발전소 폐지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강원도는 이미 민간 투자금이 투입된 데다 전력 수요는 늘고 탈원전 정책 등이 추진되면서 석탄발전소를 모두 취소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편서풍의 영향으로 동해안의 대기오염물질이 수도권으로 오기 어렵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계속되는 갈등…석탄 육상운송하려다 사과하기도
석탄화력발전소 항만을 건설 중인 강원 삼척시 맹방해변.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한 보강 공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천권필 기자
강원도의 석탄발전은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이다. 전 세계적으로 탈석탄 기조가 강해지고 기업들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책임이 강화되면서 석탄발전에 대한 시선이 더 냉랭해졌기 때문이다. 발전사인 삼척블루파워는 최근 시설 자금 마련을 위해 7%대의 고이율로 2250억 원의 회사채를 발행했지만, 매수 주문이 80억 원에 그치는 등 기관투자자에 외면당했다.
강원 동해안이 미세먼지를 피하는 ‘피미’ 여행지로 떠오르면서 주민들과 시민단체의 반대도 거세졌다. 맹방해변의 해안 침식이 발전소 때문이라는 논란이 불거져 2020년에는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항만 공사가 지연되자 삼척블루파워는 올해 초 시험 가동을 위해 동해항에서 석탄을 트럭으로 운송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시민단체의 반발과 삼척시의회의 철회 촉구에 맞딱뜨렸다. 결국, 삼척블루파워 대표는 최근 회사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홍진원 강릉시민행동 운영위원장은 “엄청난 양의 석탄을 육상운송하려면 25톤 트럭이 1분마다 주택 밀집지역을 뚫고 가야 하기 때문에 정치인들도 기업 편을 들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항만 공사는 내년 여름이나 돼야 끝날 텐데 1년 가까이 준공이 연기되는 상황을 사업자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 90% 수도권 가는데, 주민은 산불 걱정까지”
지난달 9일 강원 강릉시 안인석탄화력발전소에서 연기가 뿜어져나오고 있다. 독자 제공
강릉시청 관계자는 “석탄발전소를 가동해서 10%만 여기서 쓰고 나머지 90%는 다 수도권으로 간다. 청정 관광으로 먹고사는 도시인 강릉의 시민들은 억울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안인화력발전소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명자(58)씨는 “지난달부터 수시로 연탄가스 냄새가 온 동네를 뒤덮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팠다. 석탄이 가만히 있어도 불이 붙기도 하는데 혹시라도 불똥이 날아가 산불이 날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런 걱정에 대해 안인화력발전소 관계자는 “2호기가 3월에 상업 운전을 개시하기로 했다가 늦춰져서 보관된 석탄이 많았고, 거기에서 가스가 나와 자연발화가 있을 수 있다. 물을 뿌리고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압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릉 안인석탄화력발전소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독자 제공
발전사들, “탈석탄·탈원전 기조에 운송로 없이 제품 만든 격”
수조 원을 투입해 발전소를 지은 석탄 발전사는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동해시에서 석탄화력발전소를 운영 중인 GS동해전력 관계자는 “탈석탄·탈원전 기조에 따른 송전선로의 제약 때문에 현재도 50%밖에 가동을 못 하고 있다. 내년에는 30%밖에 가동을 못 할 것으로 보여 부도나는 업체가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 발전업계 관계자는 “송전선로를 추가하는 것이 지난 정부의 탈석탄·탈원전 기조와 배치돼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다”며 “이런 정치적인 이유로 운송할 도로도 없이 공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격이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탈석탄법 제정을 위한 시민사회연대 회원들이 지난달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회 산업위 청원소위 신규 석탄발전 중단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전문가들은 하루빨리 출구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후환경단체 기후솔루션의 김주진 대표는 “정부가 석탄발전소 가동률을 줄여서 탄소를 감축하겠다는 건 호텔을 지어 놓고 공실률을 늘리겠다는 것”이라며 “정부에서 나서서 조기 폐쇄를 시켜주는 게 대기업 입장에서도 화석연료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석탄발전 역할 있다” “출구 전략 필요”
전력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돼 석탄화력발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박호정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공급망이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석탄 발전은 안정적인 전력 발전원”이라며 “재생에너지 확대는 기후변화 대응 차원에서 필요하지만, 안정적 전기 공급원인 석탄발전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은혜 기자, 삼척=천권필 기자, 정상원 인턴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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