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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중국인들은 왜 마오쩌둥 아닌 쑨원 동상에 몰려갔나

Jimie 2023. 1. 15. 03:08

새해 첫날 중국인들은 왜 마오쩌둥 아닌 쑨원 동상에 몰려갔나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3.01.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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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62회>

<2001년 10월 10일 대만의 사관생도들이 쑨원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사진/Tao-Chuan/AFP/Getty Image>

공화 혁명의 영도자 쑨원을 기리는 난징 시민들

2020년 7월부터 중국 대부분 지역에선 불꽃을 쏘거나 폭죽을 터뜨리는 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지난 12월 31일, 정부의 금지령에도 중국 각지에선 많은 사람이 몰려서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차를 몰고 도심을 달리며 불꽃을 쏘는 이들도 있었다. 허난성에서 저우코우(周口市)시 루(鹿)읍에서는 성난 군중이 힘을 모아 경찰차를 뒤집어버렸다.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막는 공권력에 대항하는 군중의 즉흥적 시위였다.

<허난성 저코우시에서 불꽃놀이를 금지하는 경찰에 맞서 경찰차를 뒤짚고 그 앞에서 불꽃을 쏘아 올리고 있다. 2022년 12월 31.사진/twitter.com @loyyufeng_ 캡처>

2023년 1월 1일 0시 직전이었다. 난징(南京) 신제커우(新街口) 광장에선 수백 명 인파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서 쑨원(孫文, 1866-1925)의 동상을 향해 달려갔다. 이내 동상 주변을 빽빽하게 빙 둘러싼 군중은 손에 쥐고 있던 풍선을 밤하늘 멀리 날려 보냈다. 제로-코비드 정책 폐기 후 감염자가 급등세를 보이는 민감한 시점임에도 자발적으로 모여든 대규모 군중은 민국혁명의 아버지 쑨원 동상 앞에 헌화하고 색색의 풍선을 날리는 장관을 연출했다.

 

3년간 갇혀 지내던 중국 인민으로선 실로 감격의 순간이었다. 실시간 동영상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전 세계 네티즌들은 촌음을 다퉈 감탄의 트윗을 날렸다. 지난해 11월 말의 백지 혁명이 급기야 불꽃 혁명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희망 섞인 전망이 주류였다.

 

난징의 이벤트는 여느 때와 또 다른 중대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중국 인민이 경찰과 격한 몸싸움을 벌이며 항의했다는 점, 참신하고 유쾌한 이벤트를 연출해서 탄압을 일삼는 정부 당국을 조롱하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 난징의 시민들이 “쑨원”이라는 상징적 인물 아래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이 민감한 시점에 중국 인민은 왜 하필 마오쩌둥 동상 대신 쑨원의 동상 앞에 모여들었을까?

<2023년 1월 1일 0시, 경찰 저지선을 뚫고 쑨원의 동상 앞에 결집한 난징의 시민들. 사진/ https://twitter.com/TCitizenExpress 캡처>

쑨원의 상징적 지위, 마오쩌둥의 권위 위협

 

쑨원은 2천여 년 지속되던 황제지배체제를 종식한 1911년 민국혁명의 지도자이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쑨원의 가장 큰 업적은 ‘제국(帝國)’을 무너뜨리고 ‘민국(民國)’을 세웠다는 데 있다. 쑨원의 공화 혁명은 황제의 나라가 국민의 나라로 뒤바뀐 위대한 사건이었다.

 

민국혁명 112년째를 맞이하는 오늘날의 중국은 무늬만 민국일 뿐 실제로는 일인 지배의 제국으로 남아 있다. 그 점을 모르지 않기에 난징의 시민들은 110여 년 전 민국혁명의 정신을 기리며 쑨원의 동상 앞에 모여들었고, 길을 막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을 땐, 고지를 탈환하는 병사들처럼 즐겁게 펄쩍펄쩍 뛰면서 중산(中山) 선생의 동상을 에워쌌다.

 

오늘날 중국의 현실에서 쑨원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은 곧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비근한 예로 2021년 10월 10일 홍콩 경찰은 시민들이 기획했던 쌍십절(雙十節) 행사를 국가안전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금지했다. 쌍십절은 신해혁명이 발발한 1911년 10월 10일을 기리는 행사지만, 무엇보다 그날은 “중화민국”을 표방하는 대만의 국경일이기 때문이었다.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 위치한 쑨원 기념관. 이 기념관은 광저우 시민과 화교 단체의 모금으로 1931년 건립되었다. 사진/공공부문>

10월 1일을 국경일로 경축하는 중공 정부는 10월 10일을 따로 기리지 않는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전문은 쑨원의 공적을 언급하지만, 중공 정부로선 중화민국과 국민당 정권을 탄생시킨 신해혁명의 의의를 강조할 수가 없다. 쑨원은 1912년 중화민국을 창건된 공화국의 국부이며, 그의 적통을 장제스가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쑨원을 기리는 난징 시민의 이벤트는 영리하고도 대담한 도발이다. “애국심”에 불타는 한 “분노청년”은 트위터에 쑨원에 헌화하는 인민을 향해 “중화민국을 복원하고 싶냐?”고 따지기도 했다. 반면 2023년 1월 1일 차이샤 (蔡霞) 전 중앙당교 교수는 쑨원의 동상 앞에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의 행동을 기리면서 “민심의 향배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쑨원의 지위가 격상될수록, 마오쩌둥의 권위는 그만큼 실추할 수밖에 없다. 마오쩌둥의 권위가 실추되면 중국공산당의 영도력에 금이 가고 만다. 쑨원의 부상은 마오쩌둥의 추락을, 중국공산당의 몰락을 암시할 수도 있다. 지난 세기 중국혁명의 신전에서 마오의 성상(聖像) 위에 안치될 수 있는 유일무이의 인물이 바로 쑨원이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초기 마오쩌둥 비판

 

마오쩌둥 사후 중공 중앙에선 두 차례에 걸쳐서 본격적인 마오쩌둥 비판이 전개되었다. 그 첫째 계기는 덩샤오핑이 최고 영도자로 추대되어 개혁개방의 시대가 개시된 직후, 1979년 1월 18일부터 4월 3일까지 중공 중앙 제11기 3차 전체 회의에서 진행된 이른바 “전국 이론공작 무허회(務虛會)”였다. 이 대회에는 저명한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해서 마오쩌둥의 사상적 오류와 정책적 착오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그 둘째 계기는 1980년 가을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이하 역사 결의)” 초안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대적인 토론이었다. 중공 당내 중앙과 지방의 고급 간부 4천 명과 중앙당교의 1500명 교원이 참여한 이 대회에선 중국 현대사의 민감한 문제들, 특히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마오쩌둥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논쟁의 핵심 주제였다.

<전국 이론공작 무허회에서 발표된 연설문 원고. 사진/공공부문>

대체로 마오쩌둥의 공로는 평가하되 잘못은 제대로 지적해야한다는 정도의 절충적 주장이 많았지만, “비모화(非毛化)”의 필요성을 강조한 지식인과 관료도 적지 않았다. 비핵화가 핵을 없앤다는 의미이듯, “비모화”란 마오쩌둥을 오류를 밝히고 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의미였다.

 

1979년 1분기의 “전국 이론공작 무허회”는 안타깝게도 용두사미로 끝이 났다.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이 4항 기본원칙을 천명해서 지식계의 마오쩌둥 비판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었다. 4항 기본원칙은 “사회주의, 인민민주독재, 공산당 영도 및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한다는 선언이었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덩샤오핑으로선 당대 보수파와 급진적 자유파를 동시에 견제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을 수 있다.

 
<1979년 3월 30일 덩샤오핑이 발표한 “4항 기본원칙”의 길거리 포스터. 사진/공공부문>

4항 기본원칙이 선언됐음에도 1980년 9월에 열린 4천인 대토론에선 마오쩌둥 비판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일어났다. 당시 마오쩌둥 평가는 1) 건국 이후 최초 17년 역사, 2) 마오쩌둥 사상, 3) 마오쩌둥의 공과(功過), 이상 세 가지 주제에 집중되었다.

법학자 궈타오후이(郭道暉, 1928- )의 회고문에 따르면, 최초 17년의 역사를 평가할 때 4천 명 간부들은 일반적으로 당의 노선이 옳았으며 큰 성과가 있었다는 데 동의했지만, 1950년대의 숱한 정치 운동, 반우파 운동 및 대기근의 책임을 따지는 과정에선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다. 쟁론의 핵심은 그 엄청난 과오가 당 전체의 책임이냐, 마오쩌둥의 책임이냐였다.

 

두루뭉술 당의 잘못을 강조해서 마오쩌둥의 과오를 덮으려는 경향도 있었으나 다수는 마오쩌둥의 책임을 물었다. 그 중엔 마오의 오랜 혁명 동지들도 있었고, 문혁의 피해자도 있었는데, 모두가 마오의 동시대 공산당 간부들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을 논할 때, 이들은 마오쩌둥 말년의 착오도 마오쩌둥 사상에 포함해야 하느냐와 마오쩌둥 사상이 당의 지도 이념이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토의했다. 마오쩌둥 사상은 일개인의 사상이라기보단 마오쩌둥으로 대표되는 중국공산당 전체의 집체적인 이념이므로 모든 착오나 오류가 없는 완전무결한 이념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한 개인의 사상을 논하면서 사상적 오류를 배제하자는 견해는 비논리적이라는 비판도 쏟아졌다.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일개인의 소신이 당의 지도 이념이 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동시대인의 마오쩌둥 비판, 1981 <<역사 결의>>에 반영돼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역임했던 장샹산(張香山, 1914-2009)은 마오쩌둥의 “좌경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소책자를 집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의 오류를 “좌경 수정주의”로 규정함으로써 장샹산은 문혁 시기 무수한 사람을 “수정주의자”로 몰아서 박해했던 마오쩌둥을 조롱했음을 알 수 있다.

<1951년, 마오쩌둥과 리웨이한(우측). 마오쩌둥과 동향 출신으로 1910년대부터 혁명운동에 투신했던 리웨이한은 1948-62년 중앙 통전부 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혁명 원로로서 중공 중앙의 주요 보직을 맡았다. 사진/공공부문>

혁명 원로 리웨이한(李維漢, 1896-1984)의 발언도 눈길을 끈다. 그는 1918년 마오와 함께 후난성 창사에서 신민학회(新民學會)라는 결사체를 조직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리웨이한은 마오의 10대 과오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1. “신민주주의”만 잘 알고 “과학적 사회주의는” 잘 몰랐다.

2. 농민과 지주만 잘 알고 산업 노동자와 자본가는 잘 몰랐다.

3. 농업만 잘 알고 공업은 잘 몰랐다.

4. 정치경제학을 이해 못해 만년에야 경제학 교과서를 읽었는데, 스탈린의 <<사회주의 경제 문제>>만 공부했다.

5. 경제 법칙을 연구하지 않고 정치 관점에서 경제 문제를 보았다.

6. 지식분자에 대해선 세계관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고, 문외한이 전문가를 영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지식분자를) 취로구(臭老九, 악취 나는 9등 신분)라 비판했다.

7. 농민 평균주의에 빠져서 1958년 일으킨 대약진은 소자산계급의 광열성(狂熱性)을 보여준다.

8. 외부 문물을 중국이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국제수정주의라고 맹렬하게 비판했는데, 그의 자력갱생은 쇄국·자폐의 길이었다.

9. 1964년 4대 현대화를 내걸고선, 1966년 다시 4대 파괴가 시작됐다.

10. 옛날 책들만 파고들면서 고대를 현대에 적용한다고 떠벌렸다.

샤옌(夏衍, 1900-1995)은 반우파 운동 당시 마오쩌둥을 비판하면서 “1958년 마오 주석은 65세였는데, 노인성 의심증에 걸려 있었다”고 발언했다. 극작가 출신인 샤옌은 문학적 기지를 발휘해 그는 마오쩌둥의 오류를 다음의 16자로 정리했다.

거간애첨(拒諫愛諂, 직언을 거부하고 아첨을 좋아하고)

다의선변(多疑善變, 의심 많고 변덕스럽고)

언이무신(言而無信, 말에 신뢰가 없고)

면리장침(綿裏藏針, 부드러운 천 속에 바늘을 숨겨두고)

이 밖에도 마오쩌둥은 “속은 봉건주의자인데 겉만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으며, “입만 열면 진시황 얘기를 하고,” “마르크스-레닌의 저작이 아니라 중국의 25사(史) 등 옛날 책만 읽어서 봉건 사회의 제왕, 장상의 권모술수를 당내 투쟁에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역사상 최대 폭군을 들라면 반드시 그를 꼽아야 한다”며 “주원장도 마오쩌둥에 못 미쳤다”는 발언도 나왔다.

마오쩌둥의 동료들이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에 대해 역사적 총평을 내렸다는 점에서 4천인 대토론회의 중대성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결과 이들의 논의는 1981년 6월 27일 발표된 “역사 결의”에 반영되었다.

“4천인 대토론회”에 참석해서 이들의 비판을 직접 들은 덩샤오핑은 모두 9차례의 강화를 통해 “마오쩌둥 동지에 대한 폄훼와 모독은 당과 국가에 대한 폄훼이자 모독”이라면서 “마오쩌둥 동지의 착오를 지나치게 기록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동시대 혁명 간부의 마오쩌둥 비판을 덩샤오핑도 다 무시할 순 없었다.

<1981년 7월 1일 인민일보 제1면에 대서특필된 “역사 결의.” 사진/공공부문>

1981년 <<역사 결의>> 최종본에는 문혁의 총책임을 마오쩌둥에게 묻는 대목이 삽입되었다. 바로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끈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이었다”는 문장이다. 당시의 격렬한 마오쩌둥 비판이 완전히 무의미하진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후 중공 중앙은 자본주의 경제를 채택하면서도 마오쩌둥의 절대 권위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갔다. 그 결과 중국 지성계는 마오쩌둥 비판을 밀린 숙제처럼 방치하고 말았다. 중국 지식계는 대체 그 중대한 숙제를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난징의 인민이 쑨원의 동상 앞에 집결한 이 순간이 적기(適期)는 아닐까. 신해혁명 112주기를 맞이하는 오늘날도 민국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