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s

피란수도 부산은 대중가요 메카 & 인생은 나그네 방운아

Jimie 2022. 11. 26. 06:54
 

[1000일의 기억, 전쟁에서 꽃핀 문화] 1. 전시에 밴 예술혼 ④ 대중음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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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12 19:11:15 수정 : 2017-07-13 16:33:31
 
 
전국서 몰려든 가수들… 피란수도 부산은 대중가요 메카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전국에서 몰려든 대중음악인들로 대중가요 메카를 이루기도 했다. 사진 왼쪽부터 가수 정향, 작사가 천봉, 가수 방운아. 책이있는풍경 제공
 
 
끔찍한 한국전쟁의 아픔을 견뎌내고, 피폐해진 삶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 손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노래 덕분이었다고 하면 과장된 것일까. 전쟁의 기억이 오롯이 밴 대중음악은 전쟁이 한창이던 때도 어김없이 극장과 거리를 메웠다.
 

공연의 80%가 악극 형태
피란 음악인들 대부분 '투잡'
가수·레코드사 줄줄이 몰려

전후 환도 뒤엔 급격한 쇠퇴
자료 수집·음악사 연구 시급

 

■전장에서 피어난 노래 열정

 

대중음악 연구의 외길을 걸어온 김형찬 대중음악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전쟁 당시 열렸던 공연의 80%가 악극이었다고 했다. 오늘날 뮤지컬이 인기몰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이 한몫했으리라. 실제로 전쟁 당시 발행됐던 부산일보에 실린 기사와 광고 중 대중음악 관련해선 악극이 주를 이뤘다.

 

무대에 오른 가수들은 대부분 피란 음악인이었다. 지역 간 이동이 힘들었던 광복 전후 시기 부산 시민들로선 서울 등 타 지역 유명 가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지만, 지역 가수로선 설 수 있는 무대가 줄어든 것이기도 하다. 김 소장은 "지역 가수의 경우 같은 무대에 섰을지라도 광고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1950년대 말 가수로 데뷔해 부산KBS 전속 가수 실장을 맡고 20년간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부산지회를 이끌어온 최동휘(본명 최건일·80) 연합회 전 지회장은 피란수도 부산 당시 대중음악인들의 열정은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최 전 지회장은 "전시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다방이나 목욕탕에서 군용모포를 두른 채 레코드 녹음을 하고 한겨울엔 방한복을 껴입고 노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음악으로는 먹고살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중음악인 상당수는 먹고살기 위해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투잡족'이었다.

 

예컨대 가수 박재홍은 '유신전기'라는 전기 관련 부품 장사를 하면서 범일동의 군부대에서 위문공연을 펼쳤다. 평남 안주 출생으로 '빈대떡 신사'로 유명한 가수이자 작곡가 한복남(본명 한영순)은 전쟁 당시 부산 아미동으로 피난 와 국제시장에서 축음기 부품을 취급하는 고물 장사를 했다.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만주 길림에서 중학교를 다닌 뒤 1946년 고국으로 돌아왔던 가수 정향(본명 정천석)은 시계점을 운영하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부산일보에 실렸던 그랜드쇼 광고 사진. 우리나라 최초의 개그맨이자 성악가인 윤부길의 등장이 시선을 모은다. 부산일보DB

 

■부산 음악계를 지탱했던 힘

 

전쟁 당시부터 1950년대 말까지 부산 대중음악계는 그야말로 활황이었다. 부산을 기반으로 한 레코드사가 줄줄이 설립되면서 많은 작곡가와 가수가 부산을 누볐다.

 

대표적인 가수가 경북 경산 출신의 방운아(본명 방창만). 1956년 '마음의 자유천지'로 큰 인기를 모았던 그는 '부산행진곡', '인생은 나그네', '재수와 분이의 노래' 등을 부르며 부산 가요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1951년 서구 아미동에 도미도레코드사를 세운 한복남도 마찬가지. 고(故) 김종욱 대중음악 해설가는 저서 <부산의 대중음악>을 통해 "'한많은 대동강'의 손인호, '한강'의 심연옥, '죄 많은 인생'의 남백송, '꿈에 본 내 고향'의 한정무, '마도로스 부기'의 백야성, '창살 없는 감옥'의 박재란 등 많은 가수를 영입해 항도 부산을 대중 가요의 메카로 만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부산 서구 서대신동 출생 백영호(본명 백영효)도 빼놓을 수 없다. 미도파레코드 전속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방운아의 '마음의 자유천지', 정향의 '원통해서 못 살겠네'를 작곡하는 등 부산 출신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자리매김했다. 이와 함께 부산을 기반으로 이 시대를 풍미했던 대중음악인은 남백송·은방울자매·한산도·한정무·허민 등이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던 가수들이 남긴 힘은 후배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가 만들어지자 부산에서도 지부가 결성됐다. 최 전 지회장도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최 전 지회장은 "작사가 천봉 선생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은방울 자매로 유명했던 가수 박애경(본명 박세말)도 창립 멤버에 이름을 올렸다"고 말했다.

 

■환도 후 쇠퇴의 길 걸어

 

하지만 도미도레코드, 미도파레코드 등 부산에 기반을 둔 대표적인 레코드사들이 1959~1961년 서울로 옮기자 가수와 작곡가 상당수가 소속사를 따라 서울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무대는 부산에서 서울로 이동했다. 최 전 지회장은 "백영호 선생의 노래를 부르기로 하면서 서울에 갈 뻔했지만 무산되면서 부산에 남았다"며 "1960년대 초에도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선 서울로 가야 했지만, 그때는 부산서 먹고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길이 막혔다"고 안타까워했다.

 

가수 남백송·정향·허민 등은 끝까지 고향을 지켰지만, 방운아 등 환도한 가수와 달리 역사에 묻혀버리는 비운을 겪었다. 김 소장은 "부산의 대중음악은 전쟁으로 붐을 형성했지만 환도 후 급격히 쇠퇴했다. 다른 음악장르와 달리 학계 차원에서 연구가 이뤄지지 않다 보니 남은 자료도 당시 발간된 신문이 주를 이룬다. 대중문화가 공식문화로 간주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며 "대중음악이야말로 당시 상황을 여실히 반영한 장르다. 부산시 등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연구될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양가요를 연구 중인 박명규 한국해양대 명예교수도 "시대별 부산의 변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부산에 얽힌 대중가요사 연구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바다 노래에는 어촌마을 부산의 역사와 바다 사나이들의 삶의 역경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역사의 한 분야로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여진·이대진 기자 onlypen@busan.com

 

부산일보(www.busan.com)

 

 

가수 방운아♡인생은 나그네

https://www.youtube.com/watch?v=Y_fPcbNaue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