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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y Fawkes Day. Guy Fawkes Night

Jimie 2022. 11. 5. 17:46

 

 

Guy Fawkes Night, also known as Guy Fawkes Day, Bonfire Night and Fireworks Night, is an annual commemoration observed on 5 November, primarily in Great Britain, involving bonfires and fireworks displays. Its history begins with the events of 5 November 1605 O.S., when Guy Fawkes, a member of the Gunpowder Plot, was arrested while guarding explosives the plotters had placed beneath the House of Lords. The Catholic plotters had intended to assassinate Protestant king James I and his parliament. Celebrating that the king had survived, people lit bonfires around London; and months later, the Observance of 5th November Act mandated an annual public day of thanksgiving for the plot's failure.

 

What Is Guy Fawkes Day in the UK Really About?

“Remember, remember! The fifth of November, The Gunpowder treason and plot; I know of no reason Why the Gunpowder treason Should ever be forgot!” This Guy Fawkes Day let us rejoice that lives were saved and for the religious freedom that we have today.

 

매년 11월 5일 근처가 되면 사방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Guy Fawkes Day 이야기입니다.

 

이날의 유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 인간 스스로 멋대로 해석한 인간들이 교만함에서 유래합니다.

영국의 튜더 왕조 시대(1485~1603)에 영국 교회는 교황청 관할권에서 벗어나 보편 교회의 독립된 지역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출발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영국 국교회'가 되고 이어서 '영국 성공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형 아서 튜더가 요절하여 왕세자가 되었고,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로부터 관면을 받고 (1503. 12. 26) 죽은 형 아서의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하여 딸 메리 튜더를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결혼한지 20년 만에 별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520년 초부터 자신의 정부였던 앤 불린과 혼인하려고 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캐서린과의 혼인의 무효화를 허락하지 않아 로마 교황청과 오랜 갈등을 겪었습니다. 혼인 무효 결정이 지연되자 성직자와 교황청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영국 의회와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캔터베리의 대주교 크랜머와 궁정 고문인 크롬웰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혼인 문제의 해결에 나섰습니다.

 

헨리 8세의 압력으로 1531년에 개최된 영국의 성직저 전체 회의는

"그리스도의 법이 허용하는 한 국왕은 영국 교회와 그 성직자들의 최고 으뜸이며 보호자이다."라고 선언합니다. 또한 1533년에는 의회가 어떠한 소송도 교황청에 제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상소 제한법'을 제정함으로써 헨리 8세는 혼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합니다.

 

1534녀에는 의회가 국왕이 영국 교회에 대한 전권을 지닌 최고 으뜸이라고 규정한 '수장령'과 같은 혁명적 법령들을 제정함으로써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치권을 행사하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종파인 영국 국교회가 탄생했습니다.

 

1536년과 1539년에 헨리 8세는 국왕의 수장권을 거부하는 수도자들을 처형하고 수도원을 해산하며 재산을 압수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했습니다. 결국 앤 불린과의 결혼 때문에 로마 교황청에 의해 파문당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지지하였습니다. 1539년에는 가톨릭 교회의 규율을 담고 있는 '6개 항령'을 반포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헨리 8세의 교회 개혁은 종교적 동기보다는 개인적이며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가 사망하고 그의 셋째 아내인 시모어에게서 태어난 에드워드 6세(1547~1553)가 왕위에 오르고 영국 교회는 칼뱅주의 성향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합니다. 성당에서 성화상을 철거하고 교황권을 반대하고 국왕의 수장권을 지지하는 설교를 명하는 국왕 포고령들이 반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의회는 헨리 8세의 '6개 항령'을 폐기하였고,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를 허용하고 실체 변화를 부인하는 법령을 제정하였습니다.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후 아라곤의 캐서린에게서 태어난 37세의 메리(1553~1558)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메리는 아버지 헨리 8세로부터 전제 군주의 정신을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서는 환상적 가톨릭 정신을 이어 받았으므로, 아버지처럼 교회의 수장으로 처신하면서, 에드워드 6세의 법령들을 폐기하고 친 가톨릭 교회 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나 1558년 11월 17일 짧은 재위 기간을 뒤로하고 메리 1세가 사망하고 영국의 가톨릭 복귀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게 됩니다.

 

메리 1세를 계승한 엘리자베스 1세(1558~1603)가 왕위에 오른 후 영국 의회는 영국에서 교황의 권위와 관할권을 부정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국가와 교회의 최고 통치권자로 선언한 '수장령'과 '예배 통일법'을 공표하였습니다. 그리고 메리 시대에 공포한 가톨릭과 관련된 모든 법은 폐기됩니다. 그리고 영국 성공회와 국교회 체제를 확립한 '엘리자베스 정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에 엘리자베스 1세는 가톨릭과 청교도 주의자라고 불리는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을 받습니다.

 

1568년 영국 국교회로 개종을 거부한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이면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를 국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습니다. 이후 1570년 교황 비오5세(1566~1572)는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였으나 이는 영국 내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1588년 무적함대라 불리는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대에 패함으로써 영국 내에서는 가톨릭 교회 체제의 복구를 위한 저항은 사라지게 됩니다.

 

1603년 3월 24일 엘리지베스 1세 여왕이 사망하고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제임스 1세(1603~1625)로 영국의 국왕에 즉위하면서 스튜어트 시대(1603~1714)가 시작되었습니다.

 

제임스 1세의 어머니가 가톨릭교도인 관계로 영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오랜 기간 받아왔던 박해가 끝나고 메리 1세 치세와 같은 가톨릭 교회에 친화적인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임스1세는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 그리고 청교도 등이 난립되어 있다고 판단해 이를 정리한다고 하며 영국 국교회에게 친화적으로 기울면서 가톨릭교도들은 그동안 당해왔던 극심한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게다가 국왕은 성공회를 강요하고 가톨릭교도들을 전 왕들보다 더 심하게 차별을 가했습니다.

 

이에 1605년 로버트 캐츠비를 비롯한 12명의 공모자들이 제임스 1세와 그의 추종자이며 가톨릭에 대한 모든 불리한 결정의 주역인 의회 의원들을 암살하기로 모의합니다. 잉글랜드 가톨릭 신자들은 11월 5일 영국 상원의 개원식에 맞추어 의회 건물을 폭파하여 왕과 의원들을 살해하고 미들랜드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임스1세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를 가톨릭 군주로서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가담한 사람 중 가이 폭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이었으며 폭파 전문가였습니다. 이들은 의사당 건물 옆에 붙어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실을 장기 임대하고 화약을 가득 채운 나무통을 비밀리에 채워 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밀고를 해, 거사 예정 당일 발각되고 맙니다. 발각 당시 화약 운반과 쌓아 놓은 화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포크스는 화약을 쌓아 놓은 방을 지키다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런던탑에 수감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고 1606년 1월 31일 처형됩니다.

 

거사가 발각된 당일인 1605년 11월 5일 런던 사람들은 국왕이 암살을 피했다며 화톳불을 피워 축하합니다.

그 후 의회는 1605년 11월 5일 기념법을 재정하여 매년 이날을 "불행을 막는 기쁨의 날"로서 기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주동자들을 처형하는 선에서 모든 것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내에서 가톨릭이 완전히 뿌리 뽑히길 원했던 청교도들은 실망감을 안고 왕에게 항의하다 여의치 않자 신대륙으로 떠나기도 했습니다.

 

사실 가이 폭스는 역사를 평가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가톨릭 광신자 중 한 명 정도로, 과격한 테러리스트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유럽 전체가 프로테스탄트 운동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가이 폭스와 동료 12명은 가톨릭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현재 불꽃놀이는 그 의미를 잃었지만 처음 불꽃놀이가 시작될 당시에는 하느님께서 가톨릭으로부터 영국의 왕과 의회, 그리고 성공회를 지켜 주셨다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성공회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날이 되면  사람들은 교황과 가이 폭스의 인형을 불태우고 그날 폭파시키지 못한 폭약을 조롱하며 폭죽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가이 폭스와 일행들의 행동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폭력을 동반해서 당신을 옹호하기를 바라지는 않으셨을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믿고 있었던 진리를 어떻게든 지키고자 했던 그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들이 가졌던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저항 정신은 살아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 가이 폭스는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세력의 상징이 되었나 봅니다. 이제 전 세계의 많은 곳에서 정의를 외치는 분들이 조롱의 대상이었던 가이 폭스의 가면을 쓰고 시위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톨릭이야 말로  하느님 정의의 상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Fireworks display over Auckland harbo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