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문학이 모욕당해야 하는가”/ 이문열 옹호한 문인, 박완서 뿐
박완서 “문학이 모욕당해야 하는가”, 동아일보 2001.11.22.
2001년 한국 문학사에 유례가 없었던 “책 장례식” 때
“책 장례식”은 2001년 11월 한 시민운동가의 주도로 작가 이문열 씨 거주지 동네어귀에서 “이문열 씨 책은 독극물, 10원에 팔겠다”는 책 반환행사였습니다. 당시 이 씨의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 등의 시론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 일부가 이 씨의 소설을 반환하겠다며 전국에서 기부받은 이 씨의 수백 권의 책을 관의 형태로 묶어 ‘운구’하고, 어린 여자아이에게 이 씨의 책 표지사진을 모아 만든 ‘영정’을 들려 모의 장례식을 진행하였던 사건이었습니다(조선일보, 2001.11. 4).
이런 폭력적인 분위기에 소신 발언을 하는 건 ‘마녀사냥’으로 몰려 ‘신상털이’를 당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되거나, ‘대중의 공적’으로 몰려 ‘작가의 생명’마저 끝나는 위기의 순간이었겠지요. 그런데 박완서 작가는 한 명의 작가이자, 문단의 원로로서 자청해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렇게까지 문학이 모독 당하는 일이 생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이문열 씨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에겐 최소한 그런 상처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수많은 문학 단체의 침묵은 또 뭡니까.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없이 그냥 넘기는 건 문학 하는 사람들의 도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동아일보, 2001.11.22.).”
프랑스 혁명기 그가 하지 않았지만 볼테르가 한 말로 널리 알려진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당신의 의견이 핍박당한다면 나는 당신의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말’은 쉽지만, ‘행동’은,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박완서 朴婉緖
1931~2011
대한민국의 소설가. 한국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이다.
생애
박완서가 3살 때인 1934년에 아버지가 맹장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빈 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고 자랐다. 특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완서는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일본식 음독으로 보쿠엔쇼라고 불린 적은 있을지언정 이름을 고치는 일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어머니의 강력한 요구로, 1938년 개성에서 경성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 덕분에 동네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소학교부터 경성의 명문학교에 다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딸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던 시대인데도 어머니가 박완서의 교육에 열성을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어머니의 외사촌자매들은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어린 시절 자기와는 다르게 학교에 다니는 그 친척들을 무척 부러워했기 때문에 자기 딸만큼은 신교육을 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박완서의 아버지의 사망과 관련된 사연이 그 두 번째 이유인데, 사실 아버지의 사인인 맹장염은 그 시절 의학 수준으로도 수술만 받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런데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박완서의 할아버지가 병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침과 한약만으로 치료하기를 고집하다가 끝내 맹장이 터져 복막염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렇게 개성에서 살던 중 해방을 맞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숙명여자중학교[6년제]를 다니게 된다.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소설가 한말숙으로, 졸업 이후에도 절친한 사이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한 박완서의 반 담임 교사가 소설가 박노갑 이었기에 문학적으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박노갑은 그 시기의 어린 학생들이 쓰기 쉬운 감성적인 문장을 지양하고 사실적이고 경험이 실린 글을 쓸 것을 강조했는데, 훗날 박완서는 정작 그런 말을 들었던 고등학생 때는 스승인 박노갑의 소설을 읽으면서 참 재미가 없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 뒤 1950년 6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한 달도 못 되어서 6.25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에는 서울이 조선인민군의 점령 아래에 있게 되었지만 박완서네 가족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8월까지는 학교도 계속 다녔다. 당시 박완서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지만, 상황을 지켜보면서 점차 회의를 느끼고 학교에도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한 뒤로도 독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8년 열린 박수근의 유작전을 보고 그에 대한 증언의 욕구가 치솟으면서 글을 쓸 결심을 하게 된다.
처음에 제가 시작한 거는 소설이 아니라 전기였어요. 박수근 전기를 써야겠다. 투고하게 된 것도 처음부터 <여성동아>였던 게 아니에요. 여성동아에서는 7월달에 여류장편소설 마감이 있고, 또 <신동아>가 있지요. 지금은 교양지도 많지만 그때 신동아가 아주 고급 교양지였습니다. 거기서는 논픽션 공모를 했어요. 그것이 5월이 마감인데, 이듬해 1969년이었을 거예요. 논픽션은 기럭지가 길지 않아요. 여류 장편은 1,200매 이상이어야 되는데 이거는 300, 400매만 해도 되고. 그래서 저기다 내야지 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써 보려고 하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는 거예요. 그냥 PX에서 그런 일 있었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어딜 사냐, 창신동 살고.. 이런 얘기 외에는. 쓸 거라곤 나 같은 거한테 그렇게 막 취급받고 화가로서는 우중충한 데 앉아서 그리면서 얼마나 모욕스러웠을까, 고거 원고지 10장도 안 되는 거예요. 논픽션이면 그 사람이 어쩌고저쩌고 다 있어야잖아요. 그런데 아는 것도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자꾸 쓰다가 빗나가면서 내가 상상한 걸 보탤 적이 있어요. 그럴 때는 즐겁게 써져요. 원고지에다가 쓸 때니까 하루 대여섯 장만 써야지 했는데, 20장도 써지는 날이 있어. 보면 막 내가 보태는 거야. 고 다음날 계속해서 쓰려고 어제 거 읽어 보면, 이건 아닌 거예요. 진짜만 추리고 나면 뼈대만 남고. 말보다는 거짓말을 보태니까 잘 써진다 싶어요. 거짓말을 시키는 게 내 소질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때는 생각도 못했지만, 쪼끔 어려운 말로 하면 상상력이죠. 사실에다 상상력을 보태야지 사실의 뼈대만 갖고 쓰는 건 난 도저히 재미가 없구나.
그런데 만약 논픽션에 냈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당선이 됐다가도 취소가 되는 거 아니에요? 거기 규정이 있어요. 논픽션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잖아. 그러면 허가받은 거짓말이라는 건 뭐냐. 픽션이 나에게 맞는구나. 아, 거짓말을 보태니까 이렇게 즐겁고. 쓰는 게 즐거워야 되잖아요? 그래 갖고 쓰던 걸 아주 파기를 해 버렸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날짜도 좋더라고. 내가 그 해, 1970년 초였을 것 같애요. 5월달에 낼려고 쓰던 거를 2,3월 됐을 때 다 찢어버리고는 느닷없이 소설로 바꿨어요. 그거는 1,200장이나 되고 마감은 7월이었습니다. 그렇게 안 나가던 붓이 방향 전환을 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빨리 써지는 거예요.
그렇게 써낸 글이 바로 박완서의 데뷔작,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나목>이었다. 실로 대단한 점은 처음 쓰는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습작도 퇴고도 없이 단 한 번에 장편소설 분량을 주욱 써 낸 글로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박완서는 당시 글을 쓰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첫째는 상금 50만 원을 타서 남편한테 나도 돈 벌어왔다고 자랑하고 싶다는 것과, 둘째는 딸을 잘난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한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것. 고생만 하고 막상 공모에서 떨어지면 창피하니까 자식들 몰래 학교 간 뒤나 밤에 주로 글을 썼는데, 졸릴 때 자신을 격려해 준 것이 바로 그 50만 원과 어머니 생각이었다고 한다.
질문자: 처음 써 보는데 1,200매를 다 쓸 수가 있었어요, 선생님?
박완서: 그러믄요. 네.
질문자: 습작을 안 하셨잖아요?
박완서: 습작 안 해도 책 많이 읽으면 돼요.
이후 다양한 작품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전쟁 당시의 상황을 다룬 나목과 목마른 계절, 중산 삶을 다룬 도시의 흉년과 휘청거리는 오후 등의 작품을 비롯해 억압받는 여성 문제를 다룬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어진 욕망의 응달, 독립투사와 친일파의 자손 문제를 다룬 오만과 몽상, 자신의 인생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자 대표작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을 발표했다.
2006년에는 전쟁 때문에 졸업하지 못했던 모교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제의하여 받아들였다. 서울대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7번째. 박완서의 인사말. 자녀로 아들 위로 딸이 4명 더 있는데, 그 사람들 중 맏딸은 수필가 호원숙, 셋째 딸은 서울대 의대 호원경 교수다.
2008년 촛불시위 당시에 시위대와 정부 양쪽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양쪽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케이스.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당시 정부를 믿는다고 발언하였고, 4대강 정비 사업에 대하여는 정부가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2011년 1월 22일, 경기도 구리시 자택에서 담낭암 투병 중 향년 80세로 사망하였다. 평소 자신이 죽은 후 찾아오는 가난한 문인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 당부했다고 한다. 묘는 남편과 아들이 묻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다.
신앙
문학사적 의의
'한국 문단에 박완서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여성 작가들에게 얼마나 든든한 희망이었는지 선생님은 아실까요. 아이 다섯을 키우던 전업주부가 마흔의 나이에 등단하여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우뚝 솟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지요. 선생님은 40년 동안 끊임없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써 오셨습니다. 예순에도, 칠순에도, 여든이 되실 때까지도 영원한 ‘현역’이셨습니다. 감히 그만큼 훌륭해지고 싶다는 말은 못해도 박완서 선생님만큼 오랫동안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가슴에 품은 후배 작가들이 저 말고도 참 많습니다. (중략) 재미와 뼈대가 함께 있는 주옥같은 소설들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박완서’라는 크고 높고 따뜻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산골짜기를 흐르던 시냇물과, 산새들의 지저귐, 또르르 발밑을 굴러가던 도토리의 빛깔을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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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는 인공 치하 서울대학교에서 국문학과 강의를 계속해서 들었고, 북한을 찬양하는 강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를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있었으니, 아버지 없이 커온 어릴 적. 머리도 좋고 공부도 많이 해 '영웅'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그녀의 우상이었고 각별했던 친오빠가 북한의 의용군에 끌려가는 변고를 당했다. 부상을 입고 탈주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가족들이 남아있던 서울로 돌아왔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결국 사망한다. 결국 오빠의 조카들과 늙은 어머니를 먹여살리기 위해 남겨진 올케와 박완서가 가장이 된다. 박완서가 겪었던 공산주의 지배 하에서의 고난은 이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공산주의의 인간성(개성)의 말살에 대해 비판하는 등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는 계기가 된다.
'이십 대에 코뮤니스트가 아니면 하트가 없다'는 말따라 오빠는 코뮤니스트였는데 막상 전쟁의 참상을 겪더니 모든 인텔리들이 그렇듯이 코뮤니즘에 회의를 느껴 사상적 방황을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의용군으로 끌려나가더니 928 때 도망쳐서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더군요. 그런데 피해망상증과 공포로 정신이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어요(육체도 허물어졌지만). 그러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오발 사고로 총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지요. 나는 아버지가 일찍부터 안 계셨기 때문에 단 한 혈육인 오빠에게 많이 의지하고 살았는데, 아, 참으로 끔찍했어요. 오빠의 생각들로 지금도 가위눌리고, 하도 악몽을 꾸니까, '써버리면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지' 하고 좀 써버리려고 해도 너무 가까운 사람이어서인지 잘 써지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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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으로 등단하였을 당시의 나이는 39세. 그 전까지는 전업주부로 살며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몰래 집필했다고 한다. 집에서 일기를 쓰는 모습도 본 적이 없던 자식들은 어머니의 등단 소식에 매우 놀랐지만 이내 응원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원고를 받았던 기자도 40세의 전업주부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을 믿지 못해 직접 찾아와 본인이 썼는지 증명하라고 해 집필 당시 적어둔 메모 등을 보여주어 증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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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쪽에서는 근래 보기 드문 성실한 작가로 소문났었다. 그리고 특별한 이윤을 취하지 않는 작가로도 알려졌다. 물론 과도한 인세를 요청한 모 작가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 이야기이겠지만, 네임밸류에 비하면 과도한 인세 요청은 잘 하지 않고 오히려 집필에 신경 쓴 편이라서, 출판계에서 박완서의 평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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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 작가로는 드물게 일찍부터 워드프로세서로 작업했던 작가이기도 하다.
습한 얼굴로
AM 6:00이면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놓고
조용히 허무하다.
(중략)
- 엄마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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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후반 들어 대학교 대나무 숲에 가난을 간증하거나, "가난이 스펙이다"라고 말하는 등의 망언이 올라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에 대해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의 문구가 올라와 일침을 가하곤 한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에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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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작가 박경리와 친분이 깊어서 박경리의 장례식에서 울면서 조사를 읽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다. 등단하고 얼마 후 박경리와 알게 되었지만 같은 세대인데도(박경리가 박완서보다 5살 많음)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자신은 막 등단한 신인인데 박경리는 이미 유명한 작가라 함부로 다가가기 어려운 대상으로 느꼈다고 한다.그런데 남편과 아들을 연달아 잃고 슬픔에 빠져 집에서만 지내던 때, 친분이 있던 출판계 인사들이 찾아와 싫다는 사람을 잡아끌고 다짜고짜 강원도 원주에 있는 박경리 집으로 데려갔다. 그 무렵 다른 사람들은 박완서를 보면 으레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는데, 극심한 절망감에 빠져있던 박완서는 그런 위로의 말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박경리는 어설픈 위로의 말 같은 건 하지 않고 직접 농사지은 채소로 밥을 차려주며 많이 먹으라는 말만 했다. 박완서는 그런 박경리의 태도에 오히려 큰 위로를 받아 울면서 밥을 먹었고 그 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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