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가의 품격(品格)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 나라가 어떤 인물을, 어떤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를 통해서다. 2010년 3월 26일 밤 9시22분, 백령도 남서쪽 약 2km 부근에서 포항급 초계함 PCC-772 천안함이 북한 해군 잠수정 어뢰에 피격, 침몰했다. 46명의 장병이 전사(戰死)했다. 58명은 현장에서 구조됐다. 그런데 그날 이후, 우리 사회에서 천안함을 기억하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우리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영웅들을 지금 현재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갑갑하고 죄송한 심정으로 2월 말 최원일(崔元一·54) 전 천안함 함장(艦長)을 만났다.
◇“처음 3~4년은 술·담배에 의지”
― 곧 3월 26일이 다가옵니다. 어떤 심정이십니까.
“올해가 13주기인데, 매년 제가 느끼는 심정은 똑같습니다. 먼저 간 전우(戰友)들이 보고 싶고, 고통받는 생존 전우들이 많이 생각나고 그렇습니다.”
필자는 2021년 6월 천안함 생존 장병 함은혁 예비역 하사와 정현구 장병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매년 ‘그날’이 다가올 때마다 알 수 없는 스트레스에 짓눌린다고 했다.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다고 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공포(恐怖)와 더불어, ‘우리만 살았다’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 생존 장병 모두가 그날이 오면 전우들 묘소에 찾아가서 묘비(墓碑)를 붙들고 울기도 하고, 도무지 생활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함장님도 스트레스나 외상 후 증후군을 겪으십니까.
“네, 있습니다. 항상 2월이 오면, 그러니까 3월이 가까워지면 몸과 마음이 반응합니다. 몸은, 당시에 추웠던 걸 기억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날 부상(負傷)한 부위에 통증을 느끼죠. 실제로 아픈 건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아픈 건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좀 심한 고통을 겪는 날이 많습니다. 그 순간이 생각나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룰 정도죠.”
―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고백하자면, 처음 3~4년 정도는 술과 담배에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살다가는 그날의 기억을 영영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땀을 흘리는 운동을 하고, 명상(冥想) 등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또 전우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최원일 함장은 두툼한 자료를 들고 왔다. ‘그날의 기록’이다. “한 권이 아니고 여러 권입니다. 저는 ‘국방부나 해군이 당연히 천안함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진 자료 말고는 아무 곳에도 상세한 기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정리했습니다.”
― 공식 기록이 없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공식 기록은 있죠. 《피격사건 백서(被擊事件 白書)》라든가 조사단 조사결과보고서는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자료는 상부(上部)의 시각으로 작성한 문서입니다. 천안함 탑승자들이 기록한 1차 사료(史料)는 제가 기록하고 모으지 않으면 다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년부터 자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 공식 기록과 직접 작성한 자료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처음엔 승조원이 104명이라고 했죠. 정확하게는 108명입니다. 시험을 본다든가 집안 사정으로 4명이 못 탔어요. 정식으로 보고하고 승함(乘艦)하지 않은 인원입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출동한 인원이 104명, 그중 생존자가 58명, 전사자가 46명입니다.”
◇‘상부의 시각’
최원일 함장이 말한 ‘상부의 시각’이란 무슨 의미일까. MBC는 2021년 6월 <PD수첩 1292회-천안함 생존자의 증언>을 방송했다. “전역하고 MBC와 인터뷰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천안함 피폭 사건 당시에는 다들 경황이 없었죠. 그래서 당시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고, 여러 대응이 다 미흡했던 사실이 나중에 다 판명됐습니다. 저희 함정은 피격 후 전기가 나갔습니다. 통신 장비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통신이 가능한 수단이라고는 폴더폰이 유일했습니다. 침몰 과정에서 제 전화기는 없어지고 대원들 기기로 통화했습니다. 당시는 통화 녹음 기능이 없었으니까 다 수기(手記)로 적었죠. 그래서 저희 쪽 기록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나중에 기록을 열람하니 제가 일일이 보고했던 기록들이 조금씩 변형이 되고,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는 겁니다.”
― 어떤 부분입니까.
“예를 들면, 피격 판단 보고 같은 것이 누락되었습니다.”
― 사전에 ‘북이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보고하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북한은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 이후에 ‘보복하겠다’라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조선중앙방송이라든가 각종 매체를 통해 ‘보복 성전을 하겠다’라고 했죠.”
대청해전(大靑海戰)은 2009년 11월 10일 11시27분, 대한민국 해군과 북한 해군 사이에 일어났던 소규모 전투다.
북한 해군 경비정이 대청도 동쪽 NLL을 1.2해리 넘어왔고, 우리 측 대응으로 월선(越船)한 북 경비정이 반파(半破)되었다. 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북한 경비정은 다른 함선에 예인(曳引)되어 북상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이 입은 피해는 함선 외부 격벽의 파손이 전부였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군 수뇌부가 교전수칙(交戰守則)대로 대응해 얻은 승전(勝戰)이다.
◇“당시 우리 경계 태세는 평상 상태”
― 북이 복수를 공언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었는데, 왜 천안함은 위험 지역인 백령도(白翎島) 가까이 갔던 겁니까? 이런 사정 때문에, 함장이 임의로 그곳에 가지 않았느냐는 의혹을 제기한 사람도 있었죠.
“네. 있었죠. 그런데 제가 임의로 그곳까지 갔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제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북의 보복 위협에 대비한 상부 작전 지침에 따라 출동한 것이니까요. 백령도는 적(敵)의 해안포 유도탄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면서도 레이더 탐지가 되지 않는 비교적 안전한 구역입니다.”
― 그런데 뭐가 문제였습니까.
“천안함은 그 구역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죠. 대북(對北) 경계가 심화된 상태였는데, 갑자기 1월에 경계 태세가 해제되면서 평상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전환되었지만, 위협 요소는 계속 상존하고 있었죠. 대(對)잠수함 경계 태세라든가 다른 대북 경계 태세는 상향된 것이 없었고 ‘북한이 공격에 나설 것이다’라는 정보도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함대에서도 저희 배를 백령도 인근에 놔두지 않고, 당연히 더 안전한 아래쪽으로 이동하라고 했겠죠. 그때 당시 우리 경계 태세는 평상 상태였어요. 그러니까 제가 임의로 그곳까지 함정을 몰고 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 폭침 순간
― 지금 이 질문은 여쭙기가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마는, 피격 폭침 순간은 어떻게 기억합니까.
“함미 순찰 후 함수로 이동했고, 피격 15분 전쯤 함교(艦橋)에 가서 당직자들에게 지침을 내렸습니다. 그 후 접촉물이 있는지 살피고, 날씨 상태를 보고 함장실로 돌아왔죠. 각종 일지, 모니터 등을 점검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제 몸도 붕 뜨면서 물이 차올라 제 목 밑에까지 다 잠겼어요. 저는 머리 오른쪽 뒤쪽을 어떤 물체가 강타해 잠시 정신을 잃었었죠. 그때 위쪽에서 ‘함장님 계십니까?’라며 울면서 저를 계속 부르는 겁니다.”
― 배가 뒤집힌 거네요.
“배가 90도로 기울면서 문이 위쪽으로 올라간 겁니다. 저는 거의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조 요청하고 상황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고 이제 집기류들을 몸에서 걷어내는 순간 우리 전우들이 소화기로 문을 부수고 저를 구했습니다. 소화전 호스를 내려줘서 그걸로 제 몸을 묶고 올라갔던 것이 폭침 순간의 기억입니다.”
최원일 함장을 구한 장병들의 공통된 증언이 있다. 최원일 함장은 생존자를 한 명이라도 더 구하겠다며 끝까지 퇴선(退船)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천안함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서, 부하 장병들이 억지로 끌어내다시피 구조선에 태웠다고 한다.
“당연히 104라는 번호가 나와야 하는데, 점호를 하니 58에서 계속 끊어지는 겁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요. 그럼 46명이 없어진 것 아닙니까? 혹시라도 배 안에 남은 사람은 없나, 바다에 빠져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대원이 있진 않을까? 이런 생각에 배에서 이탈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배와 운명을 같이한다기보다는, 구조하지 못한 우리 전우들에 대한 책임 이런 것들이 더 많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 음모론자들
― 천안함 폭침 이후 음모론자들이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했습니다. 어떤 심정이셨습니까.
“살아 돌아와 보니까, 저희가 지켜주던 국민이 저희에게 또 다른 어뢰를 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음모론은 13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천안함 좌초설 등,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책들도 20여 종이나 된다. 그런 책의 저자들이 지금도 강연을 다니고, 인세를 받는다. 천안함 피격 폭침을 생계에 이용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법적으로 대응하려고 해도, 표현의 자유 때문에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가 ‘사실’이라고 믿었기에 그런 주장을 한 것이라면, 달리 처벌할 방도가 없다고 하네요.”
심지어 모 유명 사립 고등학교 교사는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섞어서 공개적으로 최원일 함장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 교사의 경우, 고소 등 법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미래 세대를 이끌어나갈 명문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어떻게 온갖 욕설을 섞어 저에 대한 모욕을 하는지, 그건 순전히 자기주장일 뿐이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그 교사가 반성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런 분들이 안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응원해주신 분들 덕에 살아”
―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면서 가족들 반응은 어땠을까.
“제가 한 몇 년 동안은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집사람이 그때마다 기다려줬죠. 특히 검찰에 형사 입건됐을 때는 제가 삶을 놓지 않도록 많이 격려해주면서 저를 계속 믿고 따라줬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버님은 2013년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살아계시죠. 아버님은 어쩌면 제 일로 화병이 나 가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제가 정신을 차리고 본가에 가보니까, 어머니가 갖고 계시던 금반지, 금목걸이 등 금붙이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왜 없냐고 여쭈니까 ‘팔아서 어디 썼다’라고 하세요. 나중에 확인해보니, 2010년 5월인가 6월에 모 사찰에 가서 천안함 전사 장병들을 위한 천도재(薦度祭)를 지냈더라고요. 감사하기도 했지만, 아들로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 2021년 6월 초 국방부 앞에서 시위할 때 인상 깊은 일이 있었습니다. 몇몇 현역 장병이 거수경례하고, 커피 같은 음료수도 사다 주고 응원하던 모습입니다.
“아무래도 현역은 언론 노출이라든가 의사표현을 공개적으로 하기 어렵죠. 현재도 현역 중에 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하는 행동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그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드립니다.”
― 몇몇 분이 함장님께 거수경례하며 지나갈 때 거수경례로 답하시던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도 많으시죠?
“그럼요. 그분들 덕분에 제가 살고 있는 거죠. 제가 한창 수사받던 2010년 5월, 6월엔 편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아들이 군에 가 있다는 어머니, 교도소 재소자까지 편지를 보내왔어요. ‘현충원에 왔다가 함장님 눈물 흘리는 거 보고 가슴 아파서 편지 보냅니다’라는 여학생의 편지도 기억합니다. 받은 편지는 지금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는 편지로 했지만, 지금은 제가 소셜미디어를 시작해 페이스북 메시지라든가 인스타그램 DM 메시지를 통해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죠. 그분들 격려 덕분에 지금 또 힘내서 이렇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326호국보훈연구소
― 어떤 활동입니까? 단체를 하나 만들었죠?
“네. 작년 3월에 국가보훈처로부터 사단법인 인가가 났습니다. ‘사단법인 326호국보훈연구소’는 비영리 법인입니다. 연말에 지정기부금 단체 승인도 받아서 올해부터 서울 모처에 사무실을 내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 어떤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까.
“이름 그대로 326호국보훈연구소입니다. 3월 26일을 기억하고, 그날 백령도 바다에 있었던 군인들을 기억하자는 겁니다. 강연, 세미나 등을 통해 잘못 알려진 얘기들을 바로잡고 국민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자 합니다.”
― 아까 편지 얘기 중에 ‘함장님 눈물’ 이야기가 있었죠? 천안함 관련 보도를 검색하는데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3월 26일에 현충원에 가서 생존 장병들과 함께 추도 행사하며 함장 이하 모두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생존 장병들은 자주 만나시나요.
“각자 현업이 있으니까 그렇게 자주 만나지는 못합니다. 우리 전우들은 13년간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어요. 58명 생존자 중에 23명은 아직 군복을 입고 있고 35명은 전역했습니다. 제가 현역 때 진급이 잘 안 됐다고 그랬잖습니까? 생존 현역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건 또 왜 그런가요.
“트라우마 때문에 배를 못 타니까요. 해군은 진급 점수가 있는데, 배를 못 타니까 점수가 모자라는 거죠. 또 승진 누락으로 전역하면 국가유공자가 돼야 하는데, 그것도 어렵습니다. 진료 기록이 없으니까요. 왜냐하면, 현역 때 부서장이나 함장한테 가서 ‘정신과 다녀오겠다’라는 말을 못 한 겁니다. 우리나라 보훈 정책은 ‘개인 입증주의’입니다. 기록이 없으니 신청 자체를 못 하는 거죠. 주말에 일반 병원에서 진료받은 친구들은 누적 기록이 있으니까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들에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 뭡니까.
“나이가 젊으니까 직업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취업 지원하면 서류 심사는 통과인데, 마지막에 항상 불합격합니다. 정신과 치료 이력 때문이죠. 기업 하는 분 입장에서 생각하면,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국가가 유공자라는 걸 입증해줘야”
― 한숨이 납니다. 해결책은 뭘까요.
“뭔가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현역 군인들에겐 승진 시 평균 점수라도 준다든가, 전역한 친구들은 국가가 유공자라는 걸 입증해줘야죠. 천안함 피격 폭침 사건은 국가적인 사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국가보훈부에서 전원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고, 특별 채용의 길도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미국은 전사 장병의 유해를 끝까지 발굴한다. 시간, 비용이 얼마든지 들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아직도 6·25당시 전사한 장병의 시신을 수습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끝까지 챙기는 건 나라다운 나라의 참모습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의 조치는 많이 미흡해 보인다.
― 국민 여러분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은.
“천안함을 기억해주시고, 또 격려해주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분들이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잘못된 정보나 왜곡된 사실에 현혹되어 진실이 무엇인지 잘못 아시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관련 자료와 정부 공식 발표를 잘 보아주십시오. 천안함은 대한민국 NLL 바다를 지키기 위해서 전국 팔도 출신 군인들이 모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던 함정입니다. 이들은 영남, 호남처럼 특정 지역을 지킨 군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을 지켰습니다. 특정인을, 당시 정권과 정부를 지키던 군인들이 아닙니다.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키던 군인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의 희생,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길이길이 기억해주시고, 더 이상 이분들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 더 자세한 기사는 <월간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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