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패러디… MBC '김건희 방송'이 불러낸 현상
[동서남북] MBC ‘김건희 방송’이 불러낸 뜻밖의 현상
“그 쥴리가 아니라 이 쥴리였네.” 지난 16일 밤 로마의 영웅 줄리어스 시저 동상에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부인 김건희씨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들이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 곳곳에 올라왔다. 강성 친여 유튜브 ‘서울의 소리’ 직원이 몰래 녹음한 김씨와의 전화 통화 내용을 MBC에서 방송한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이른바 접대부설(說)에 나온 이름을 가져와 만든 우스개용 합성사진(인터넷 ’짤’)에 사람들이 반응한 것. 멋진 여성 첩보원이 나오는 샤를리즈 테론 주연 할리우드 영화 ‘아토믹 블론드’를 패러디한 포스터, ‘원더우먼’을 합성한 사진 등 꽤 정교한 패러디물도 속속 퍼져나갔다. IT 기기 사용에 능하고 유튜브·트위터 등으로 뉴스를 접하는 2030 세대들이 집단적으로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일부 여당 의원들이 “본방 사수”를 외치며 대단한 폭로를 기대했던 것과 달리, 방송은 야당 후보 부인에게 ‘걸크러시’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예상 못한 국면을 만들어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관련 미투에 대한 부적절한 인식, 선거운동 관여를 시사하는 언급, 도사 발언 등 대통령 후보 부인으로서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매체를 통해 이상한 사람으로만 그려졌던 후보자 부인에 대해 “털털하면서 입담 좋은 아줌마 같다”는 인식 변화를 촉발한 것도 사실이다. 젊은 층은 이런 ‘의외성’에 재미를 느끼고 패러디물을 쏟아낸 것이다. “정치가 예능이냐”는 비판이 붙지만, 선거 국면에 이런 움직임을 모르는 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국민 중 소셜 미디어를 통해 뉴스·시사 정보를 얻는 비율은 이미 55.8%(2021 언론 수용자조사·복수응답 합산)에 이른다. 젊은 층 비율은 이보다 더 높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다. 이 패러디 사진들이 온라인 여론을 장악하는 데는 방송이 끝난 뒤 서너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저 각자 자기 느낌을 담아 게시물을 리트윗하고 공유하는 사이, 새로운 인터넷 밈(meme)이 만들어졌다. 비장한 모습으로 소식을 전하던 MBC 취재진의 모습이 되레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국민 누님’ 별칭은 이 ‘놀이’의 주체가 젊은 남성 그룹임을 시사한다. ‘이대남’(20대 남성)으로 통하는 이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하루 24시간 ‘짤’과 ‘밈’을 만들어 돌리는 막강한 ‘선동 능력’을 갖췄다. 하지만 최근까지 이들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에서 배척당해왔다. 조국 등 집권 세력의 위선을 지적하면 정치적 올바름에 위배되는 ‘일베 미친 놈’, 여성주의와 대결하면 ‘한남충’에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기득권이 된 386세대의 위선과 내로남불을 지적한 ‘386OUT’의 필진인 웹진 ‘제3의길’의 나연준 편집위원에 따르면, 이들의 탁월한 선동 능력은 역설적이게도 “공론장에서 배척당했기에 획득된 것”이다. 연구자들 사이에선 취업과 연애, 결혼과 출산 등 부모 세대의 평범한 소시민적 삶조차 누리기 쉽지 않은 환경에 놓인 20대의 분노를 기성 정치가 외면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인터넷에 활성화된 커뮤니티는 이 배척당하고 쫓겨난 존재들이 찾아든 정치적 소도(蘇塗)였고, 그곳에서 이들은 짤과 밈, 드립을 자신들의 정치적 언어로 선택했다.
억압당한 것은 언젠가는 귀환하는 법이다. 최근 야당 대선 후보까지 가세했던 ‘멸공’ 또는 ‘멸콩’ 드립은 이들에게 보내는, ‘이제 나와도 괜찮다’는 신호로 읽힌다. 그리고 MBC가 공개한 ‘녹취록’은 이들을 본격적으로 링 위로 불러낸 셈이다.
MBC나 현재의 여권은 자신들이 가장 능했던 ‘선동’의 방식으로 되갚음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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