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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백화암(白華庵)

Jimie 2021. 12. 3. 11:39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백화암(白華庵)

 

금강산은 조선과 세계적인 명산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는 9세기경 신라 남해왕 때 세운 절이라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천축국에서 보내온 53불을 이곳 느티나무숲 자리에 모셨고 아름드리 느릅나무(楡)가 많아 유점사(楡岾寺)라 칭... 강원도 고성군 서면에 위치하며 일제때 전국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나 6.25전쟁 중 소실되었다.

 

금강산 유점사의 예전 모습. 6 ·25전쟁 때 모두 소실돼 현재는 터와 석탑만 남아 있다.

 

금강산 유점사는 법기보살이 상주하는 화엄도량, 금강산 최초의 가람,

금강산 4대 사찰을 비롯한 인근 군에 60개 말사를 거느린 대본산.

경성(서울)에는 불이성 법륜사(태고종 총무원)가 현존하는 유일한 포교당이다.

 

유점사 능인보전(대웅전)

金剛山 楡岾寺 能仁寶殿

*능인 [能仁] : 능히 어짊을 베푼다는 뜻으로, 부처님, 석가모니를 이르는 말

 

백화암(白華庵)

강원도 고산군 오대면 금강산(金剛山)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암자.

다른 이름::: 축성암(祝聖庵) ; 강원도 고성군 오대면 냉천리

 

일제강점기에는 건봉사(乾鳳寺)의 말사였다. 845년(문성왕 7)에 창건되었으며, 그 때는 축성암(祝聖庵)이라고 하였다.
1846년(헌종 12)에 불탔으며, 1858년(철종 9)에 석담(石潭)과 몽허(夢虛)가 중창하였다. 그 뒤 1878년(고종 15)에 불에 타서 다음해에 다시 중수, 수도도량으로 명맥을 이어왔으나 현재의 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고성 건봉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고, 6·25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능파교와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새겨진 돌기둥 등이 있다.
또 부속 암자로는 보림암·백화암·봉암암·극락암·백련암·반야암·청련암·대성암·적명암·보리암·보문암·대원암·일출암·안양암·동대암·망해암 등이 있었다.

▲ 내금강 표훈사 전경. 왼쪽에 반야보전, 오른쪽에 능파루가 보인다. <사진 = 이지범>


표훈사 부속건물의 하나인 릉파루 역시 금강산의 자연풍치에 어울리게 잘 지은 2층다락건물이다.

릉파루에는 금강산을 이웃집 다니듯 하던 19세기의 풍자시인 김삿갓(김병연, 1807-1863년)이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그 특징을 생동하게 노래한 즉흥시 두수를 지어 시짓기내기를 하던 량반들을 골탕 먹이였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그때 시인이 지은 즉흥시다.


나는 금강산이 좋아 찾아 가는데
푸른 물아 너는 어찌하여 오는가
... ...
소나무 소나무 잣나무 잣나무
바위바위를 돌아서니
물물산산
가는곳마다 신기하구나

 

“내가 본 산들은 모두 흙더미, 돌무더기였구나!"

 

내금강 순례기

기둥하나에 의지해…보덕암

 

만폭동 계곡을 오르다 분설담에서 오른쪽 절벽을 올려다보면, 탄성이 절로 나오는 암자 하나가 눈에 띈다. 직벽에 암자 한 칸이 구리기둥 하나에 의지해 앉아있다. 보덕암이다. 고구려 때 보덕화상이 자연동굴에 보덕굴이라 이름하여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보덕암은 167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기둥 하나에 의지해 절벽 끝에 매달린 암자 보덕암.

영조때 선비인 김창협(1651~1708)은 금강산을 여행하고 쓴 <동유기>에서 보덕암의 절경을 극찬했다.

 

"앞기둥은 바위 밖에 나가 붙은 데가 없어서 수십 척 되는 구리기둥으로 이를 받치고 다시 두 줄의 쇠사슬로 엮었다. 그러므로 처음 그 위에 오르려면 흔들거려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 같으니 어지럽고 기가 질려 감히 아래로 내려다볼 수가 없다. 암자의 북쪽에는 천연으로 된 대가 있어 역시 굴의 이름을 붙였는데 거기에 올라 대소 향로봉을 굽어보면 그 형상이 마치 어린아이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 같다."

 

김창협의 글에 따르면 보덕암은 이전에는 보덕굴로 불렸던 모양이다. 1511년 처음 설치한 구리기둥은 나무기둥에 그 겉을 구리동판으로 감싸 보강한 것이다.

 

보덕암으로 향하는 길은 출렁거리는 다리로 계곡을 건너 수백계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을 오르는데, 뱀한마리와 도마뱀 한마리가 겁없이 돌계단 위로 올라왔다 이내 놀라 달아난다.

 

오르고 내려오는 길이 늦어지다보니 점심공양시간을 훨씬 넘기고 말았다. 백화암터로 향하기 전에 표훈사 아래 함영교 아래 임시로 공양간이 마련됐다. 북측 안내원들이 마련해준 음식은 내금강에서 난 산나물로 만든 소박한 음식. 삶은 곰취에 시커먼 된장을 찍어 싸먹는 쌈이 어느 진수성찬도 생각지 못하게 한다.

 

서산, 사명 수행했던 절은 사라지고…백화암(白華庵)터

함영교를 건너 전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가니 부도탑과 탑비가 줄지어 서있는 백화암터가 나온다. 백화암은 사라졌으나 서산대사부도비를 비롯해 일곱개의 부도와 3개의 비석이 남아있다. 백화암 수충영각에는 나옹·지공·무학·서산·사명대사 등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으나 소실되고 말았다.

 

백화암터 부도군. 맨 왼쪽이 서산대사비. 높이가 5.9미터에 달한다.

 

이곳 백화암(白華庵)터에는 서산대사(白華道人) 의 비와 스님의 제자 편양,언기스님, 언기스님의 제자 영조스님, 또 그제자 이심스님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4대에 걸친 스님들의 부도 비문을 월사 이정규와 아들 이경석 등 월사 가문이 4대에 걸쳐 썼다는 것이다. 지금은 북측이 마련한 안내비석이 가장 눈에 띈다. (보존급유적 제306호) 그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비록 중이었으나 왜적의 침략을 물리치는 투쟁에서 큰 공을 세워 우리 인민들 속에 널리...."

 

나옹선사와 김동거사…삼불암

백화암터를 나와 전나무 숲길을 또 걸으면 큰 문이 버티고 선 듯한 바위를 만난다. 오른쪽의 큰 바위는 나옹선사가 새겼다는 삼존불이 모셔져있고, 왼쪽 바위에는 60개의 화불과 보살 두분이 새겨져 있다. 이 두 바위에는 나옹선사와 김동이라는 거사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나옹선사와 김동의 설화가 전하는 삼불암.

 

개성출신의 부자 김동 거사는 표훈사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키고 불교를 공부했으나 시기심을 버리지 못했다. 이를 안 나옹화상이 김동거사에게 삼불암 바위에 부처님을 새기는 내기를 하자고 청했다.

 

나옹선사를 이기고 싶었던 김동은 많이 새기겠다는 마음만 앞서 60개의 화불을 새겼으나 세분의 부처님을 모신 나옹선사에게는 미칠 수 없었다. 게다가 한 분의 부처님은 귀를 빼먹고 새기는 실수를 범했다.

 

그제야 자신의 시기심을 뉘우친 김동은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뉘우치고자 울소로 뛰어들었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동의 아들 삼형제 역시 울소 깊은 물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뒤따랐다. 그러자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몰아쳤고, 다음날 비가 그치자 그 4부자의 시신은 바위가 되어 울소 옆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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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폭포는 중향폭포()라고도 한다. 설악산의 대승폭포(), 개성 대흥산성()의 박연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 중 하나 이다.

 

구룡폭포(布)

금강산 비로봉에서 동쪽의 구룡대 아래 화강암으로 된 계곡에 크고 작은 못들이 여러 개 있는데 그 중에 큰 것 8개를 팔담이라고 하며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금강산 상팔담과 관련한 <금강산 팔선녀>전설이다.

상팔담( )

상팔담

내금강 대찰터엔 잡초만…장안사터

 

만폭동 계곡을 따라 올랐던 순례길은 장안사터를 마지막으로 참배하고 끝을 맺는다. 장안사터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모두 무겁다.

 

551년 고구려 혜랑스님이 창건한 장안사. 한때는 금강산 4대 사찰로 그 위용을 자랑했던 장안사는 지금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전각 13개와 10여채의 부속건물을 거느린 대찰이었으나 전쟁을 겪으면서 남은 것은 주춧돌과 돌계단, 그리고 멀리 서있는 부도 하나가 전부이다.

 

순례에 앞서 보았던 해방 전의 장안사를 찍은 사진이나 진제 김윤겸의 그림을 떠올려보니 오늘의 장안사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난다.

 

세상에 항상하는 것이 없는데, 절이라고 영원불멸하랴마는, 대찰이 이렇듯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에 순례자의 마음은 무거워진다.

▲ 김윤겸의 `장안사`(1768).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0년을 기다려 찾아온 내금강 길. 옛날 명나라 사람 오정간은 황산을 둘러보고 나서 "반생 동안 본 산들은 모두 흙더미, 돌무더기들이었다"라고 했다는데, 지금 나의 마음이 그러하구나.

 

나는 아직 황산을 보지 못했으나 그것이 금강에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오정간이 금강산을 보았더라면 그런 말은 차마 하지 못했으리라.

 

행여 내금강을 가거든 계곡길 오르느라 앞사람 발뒤꿈치만 좆지 마시라. 계곡 바위 하나 하나에 얽힌 부처님 이야기를 생각하고 팔만구암자 곳곳에 서린 스님들의 수행담을 떠올리며 한 발 한 발 올라서시길...

<끝>